-> 투병수기
암과 함께 다시 태어난 삶
장지혁 기자 입력 2013년 09월 30일 15:15분493,341 읽음
김연희(41세) |자궁암

서른여섯 살에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2008년 1월이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그때까지 내 인생은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 미움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나는 1995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던 나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시골에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집안의 장남이었다. 나는 막내였으며, 도시 여성이었다. 이러한 차이점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불과 며칠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암을 진단받았던 2008년 1월까지 하루도 남편과 싸우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으며, 여기에 시부모님과의 갈등은 몸과 마음을 점점 더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쌓아만 두는 스타일이었으며, 어떤 사건이나 일이 생기면 부드럽게 돌려서 말하거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댁의 식구들은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을 하고 바로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갈등을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나의 편을 들기보다는 언제나 나의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마음속 가득 분노와 미움만이 쌓여갔다.

하루를 살면서 가장 가까이 애정과 이해심을 보듬으면서 예뻐하면서 살고 싶었지만 매일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미워하며 살았다. 나는 남자 하나만 바라보고 결혼했는데….

장남이었던 남편은 시댁에서는 영웅과 같은 존재였다. 시어머니는 나를 며느리로, 한 사람으로서 대하기보다는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온 돈을 펑펑 쓰면서 호강하는 사람으로 생각한 듯 했다. 시댁의 식구들은 모두 남편에게 의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면서 출혈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몇 년 전에도 이런 증상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졌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증상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 2007년 봄이었다.

병원에서는 초음파검사를 하고서 염증이 있는데, 그 밖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염증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도 같은 증상이 생겨서 병원을 찾았다. 그때는 조직검사를 해봐야겠다면서 예약 날짜를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또 몸이 괜찮아지는 듯하여 예약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증상을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당시 에어로빅 운동에 열중하고 있던 터였는데, 운동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지나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새해가 밝았다. 그때 다시 하혈이 시작되었는데 증상이 너무 심해 결국 같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 담당 의사는 지금은 출혈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큰 병원으로 가보아야 할 것 같다면 소견서를 써주었다. 곧바로 근처에서 가장 큰 병원인 성가롤로병원에 방문하여 조직검사를 받았다. 담당자는 4일 후에 보호자와 동반하여 검사결과를 받으러 오라는 말을 전해주는데, 나는 속으로 ‘뭔가 잘못되었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 되었다.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아 담당 의사를 만나서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의사가 무어라 계속 얘기를 하긴 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남편도 나도 갑자기 멍해져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의사와의 면담이 끝나고 남편과 나는 차로 돌아와 앉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좁은 차안에서 남편과 나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끝없는 눈물은 얼굴을 흘러 마음을 적시었다. 덩치가 큰 남편은 운전석에 쭈그려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의사의 말은 자궁입구에 4Cm 정도 크기의 암덩어리가 있으며 골반과 주변 임파선에 퍼져 있는 상태이고 최선을 다해서 치료하겠다는 것, 생존율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 말은 곧 내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아직 젊고 한창인 30대 중반의 나이였고 이제 아들 둘은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으로 아직 어리기만 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두 아들 생각만이 가득찼다. ‘이 불쌍한 아이들을 어찌하나….’

순천의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대학병원이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전남대 병원에 방문하여 담당 의사를 정하고 1월 25일 수술을 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였는데 담당 의사가 지금 상태에서 전이된 부분이 여러 군데다. 만약 수술을 하고 항암과 방사선을 진행하면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은 차후에 상황을 봐서 진행하고 먼저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병행하자고 권유를 했다. 또 담당의사는 이런 상태에서 5년 동안 살아 있을 확률이 약 20% 정도밖에 되지 않고 차후에 언제라도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친절하게도 알려 주었다.

약 3개월에 걸쳐서 주말을 빼고는 매일 오후에 병원으로 치료를 위하여 출근하였다. 남편은 회사에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해 매일 나를 차에 태워 같이 병원을 다녔다. 그 기간 동안 방사선 치료를 총 53회, 항암치료를 총 6회에 걸쳐 진행하였고 다행히 치료를 함에 따라 암의 크기를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암의 크기는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몸은 크고 작은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생리가 끝나버렸으며, 양쪽 발의 감각이 사라졌다. 갑상선 기능도 저하되어 호르몬 약을 먹어야 했고 아직까지도 양쪽 발에는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체력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심리적으로는 깊은 우울감이 찾아왔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병원의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냉장고에 있던 햄을 꺼내 비닐 껍질만 벗긴 채로 우걱우걱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암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나는 그 광경을 보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밤 아이들은 차가운 햄을 날것으로 먹고는 밤새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나는 그 모습에 속이 아파 밤새도록 멈춰지지 않는 울음을 쏟아냈다.

그러던 중 이전에 다녔던 교회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원래 기독교였지만 살면서 그다지 큰 믿음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애처로운 처지를 어딘가에 이야기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다시 교회를 찾았다. 오랜 시간 기도하면서 그 동안 마음속에 있던 미움과 원망들이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암은 내가 고칠 수 있으며, 원망과 미움은 모두 비워 버리고 그 자리에 긍정과 사랑을 심어야 한다는 생각과 결심이 들었다. 이런 마음이 생기자 전에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나는 살 수 있구나’라는 정반대의 생각으로 바뀌었다.

병원을 다니면서 하루하루가 너무도 힘들고 지옥과 같았지만, 이젠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같이 하신다는 확신으로 두려움조차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결심이 생기고 나니 살고 있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변하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루하고 끔찍한 치료도, 몸속의 암도, 주변 환경도 그대로였다. 다만 내 마음만이 변화했을 뿐이었다.

병원의 치료가 마무리되고 담당 의사는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두 했으니 더는 해 줄게 없다는 말과 함께 병원의 치료가 끝났다는 통보를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 근처에 두 시간 정도 코스로 멋진 산이 있다. 등산을 거의 매일 꾸준히 다녔다. 산에 가보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처지에서 투병을 하기 위해서 산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채식주의자처럼 먹게 되었는데 당시 순천에 있던 하나한의원 원장님이 나의 체질을 감별하고는 체질에 맞는 음식과 식단을 소개해 주셔서 그대로 따라서 했다. 또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 하나한의원에서 조제해준 약을 먹기 시작했다. 병원 정기 검진에서는 눈에 보이는 암은 없지만 피검사를 해보니 암수치가 역시나 암환자처럼 나왔는데, 한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피검사 후에 나오는 암수치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운동과 식이요법, 또 한약과 야채즙을 비롯한 몇 가지가 면역력을 올려 주고 있었다.

암을 진단받은 지 이제 5년이 지났다. 몸에 암이 없기 때문에 건강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 암을 진단받고 너무 성급하게 병원치료에만 몰두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서 암과 투병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든다. 암이라는 병이 아무리 위급하고 중한 병이라 해도 몸에 너무 많은 상처가 남았다. 또 암을 치료하는 데에는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아주 많은 요법들이 꺼져가는 생명불을 다시 타오르게 해주었다.

지금 내게 하루는 너무도 소중한 하루이다. 이제부터는 보너스 인생이고 아름다운 삶이다. 아직까지는 건강을 좀 더 찾아야 하겠지만 앞으로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암진단을 받은 사람들에게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투병을 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다. 암은 나의 조건을 건강에 맞추고 노력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암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으며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들 또한 새로워졌다. 아이들도 엄마의 어려운 처지를 보면서 어느새 철이 들었고 이제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새록새록 생긴다. 앞으로는 나를 돌아보며 더 성숙해지리라 다짐한다.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는 삶을 살리라 결심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암으로 다시 태어난 나는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월간암(癌) 2013년 9월호
추천 컨텐츠
    - 월간암 광고문의 -
    EMAIL: sarang@cancerline.co.kr
    HP: 010-3476-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