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부부의 사랑은 암을 녹이고
임정예 기자 입력 2013년 08월 30일 18:39분521,939 읽음
아내 김숙희(가명) | 대장암 4기 충남 천안

1983년 3월. 고모님의 소개로 아내 김숙희를 처음 만나고는 만나 인연이다 싶어 이듬해 봄에 결혼을 했다. 나는 한 집안의 장손이자 가장으로,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꾸리며 무탈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큰딸이 올해 2월 출산을 하여 손녀를 품에 안아보았다. 아내의 대장암을 이겨내려고 함께 울고 웃고 애쓰던 지난날들이 헛된 게 아니었음을, 새 생명으로 보답 받은 듯하여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내는 2006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50대 초반. 평생 병 없이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고 할 정도로 튼튼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암은 4기였다. 다발성으로 이미 결장과 폐에도 전이가 되어 있었다. 진단을 내린 병원에서는 나를 조용히 따로 불렀다. 앞으로 6개월 정도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장암의 첫 증상은 대수롭지 않았었다. 배변이 불편해졌고 변에 피가 섞여 나왔었다. 하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고 집안 식구들 중 누구도 암에 걸리거나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변비에 치질이나 그 정도로만 생각을 했지 암의 증세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배변이 불편해져서 동네의 개인병원을 찾았다가 큰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천안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대장암 4기. 결장과 폐전이 진단을 받았다. 정신없이 입원하여 며칠 동안은 내내 암과 관련한 모든 검사를 받았었다. 일단 급한 대로 대장에 있는 용종을 제거하고는 폐 수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담당의사가 다행스럽게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의사는 폐 수술을 하기 전에 모든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었고 나는 그 말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온갖 검사를 하라는 대로 다 받았는데 왜 또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행을 결심했다. 처음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 담당자는 입원을 하려면 2주에서 3주 정도는 대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와 아내는 며칠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다른 병원도 돌아다녔지만 비슷한 말을 들어야 했다. 기본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주위 사람들을 동원해서 서울 송파의 대형병원에 입원했었다. 1인실 특실이었는데 하루 입원비만 75만 원이었다. 아내는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 갔는데 특급호텔에 묵은 듯 하다면서 마치 신혼여행을 온 기분이라며 속없이 좋아했었다. 병원답지 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입원실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은 아름다웠다. 1인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2인실, 그리고 4인실로 병실은 차츰 옮겨졌다.

수술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추천도 받고 해서 결정한 의사는 마침 외국으로 연수를 떠나 2주 정도가 지나야 귀국을 한다고 하였다. 담당 의사는 결장 쪽에 있는 암 때문에 대장이 막힐 수도 있다고, 일이 커질 수도 있다고 하여 우선은 수술을 빨리하는 쪽으로 결정하였다. 당시 담당 의사의 소견으로는 장을 수술하는 주된 목적은 암이 아니라 배변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암은 다발성으로 폐에도 있고 장에도 여러 군데 퍼져 있는 상태라 수술로는 암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자신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수술대에 실려 들어가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깊은 절망에 빠져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의사가 6개월 밖에 못산대……

수술은 다행히 큰 문제없이 끝났고 다음으로는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항암치료를 하기 전에 아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를 넣어 암 수술이 끝났으니 지금 와서 만나라고 전하였다. 아내는 오랫동안 못보고 지낸 친구, 동창, 동네 사람들 할 것 없이 줄줄이 면회를 오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가고 나면 큰 병도 아닌데 이 먼 곳까지 힘들게 오라고 했다며 나를 타박하곤 했다.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2006년 3월 16일부터 시작된 항암치료는 24개월 동안 진행되었고 폴폭스, 젤로다, TS-1, UFTE 등 국내 병원에서 판매되는 항암제는 내성이 생길 때마다 바꿔가면서 맞았다. 아내는 머리카락이 다 빠져가도 다행히 큰 부작용 없이 견뎠다고 덤덤히 말하곤 했다. 항암을 계속하면서 나는 이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기 시작했고 대체요법을 배워가면서 하나씩 적용해보기 시작했다. 암과 관련된 카페는 10여 곳을 가입해서 닥치는 대로 읽고 질문하고 적어놓고 정리를 했다.

가장 먼저 변화를 준 곳은 물을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 몸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암환자가 그에 맞는 물을 먹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PH수치를 토대로 약알칼리성 물을 찾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알칼리 물을 따로 구입하여 먹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요로법을 시작했다. 요로법을 접하고는 아내가 과연 따라줄까 싶어 걱정하다가 먼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체험을 하였다. 그 때문인지 아내는 큰 거부감 없이 요로법을 받아들였다. 그 이외에도 야채스프나 키토산, 겨우살이 등 암에 좋다고 알려진 식품과 제품들을 사서 먹였다. 운동은 자연과 함께 있는 등산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등산을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이런 것들은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병원에서는 아내가 건강식품이나 이런 것들을 먹는 것을 보고는 나를 말렸다. 그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못 먹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6개월 밖에 못산다는데 후회가 없도록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니들도 암에 한 번 걸려봐라.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암 관련 카페에서는 현대의학과 대체의학에 관한 갈등이 많다. 개인병원이나 한의원 관계자(?)가 글을 쓰면 카페관리자가 홍보로 간주하여 거의 삭제하는 편이다. 나는 편견 없이 모든 글을 다 읽는 편이었는데 당시 경남 진주의 한 한의사가 쓴 글이 잠시 올라왔다가 삭제되어 사라졌다. 그 잠깐 사이에 나는 글을 보았고 아내를 떠올렸다. 현대의학에 전적으로 기대어 항암화학요법을 2년을 넘게 받아왔지만 아내 몸속의 암은 그대로였다.

의사의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최초 진단으로 생존 기간이 6개월 정도였는데 항암제 덕분에 2년이 넘도록 생존하고 있다. 하지만 암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은 다르다. 앞으로 몇 개월, 일이년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의 2년처럼 힘들게 항암치료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내의 암이 없어져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다른 요법들을 찾아 끊임없이 시도하였던 것이다. 거기다 항암제들은 모두 내성이 생겨 이제는 더는 맞을 항암제도 거의 없을 때였다. 건강보험 혜택을 볼 수 없는 약들이라 의료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있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잠시 올라왔던 그 글을 읽고 나는 곧장 경남 진주의 그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2008년 3월 19일이었다. 그리고 한의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지금까지도 먹고 있다.

그 뒤로 암은 이제 더 퍼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상태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담당 의사는 나를 불러 폐에 있는 암을 수술로 없애보자고 하였다. 처음 대장암 수술 때에도 암을 모두 제거하지 못했었기에 폐 수술을 또 하면 몸에 상처만 입고 말까봐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편안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만약 의사선생님이나 가족 중 한 사람이 내 아내와 같은 경우라면 선생님은 수술을 받도록 하시겠습니까. 담당 의사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할 것이라고 대답하셨고 그 말에는 거짓이 없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다행히 폐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암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2008년 6월이었다. 이 폐 수술을 마지막으로 병원 치료는 더 이상 받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고 있다.

처음 암 진단을 받고 가족 모두는 매일이 울음바다였다. 아내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 통장과 보험, 집안 살림살이의 소소한 것들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천안의 구성산을 매일 오르면서 흘린 눈물은 또 얼마이던가. 아내는 가족, 특히 아직 어린 아들 생각에 산을 오르다 말고 엎어져서 울기가 일쑤였다.

암은 아내뿐 아니라 우리 가족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집 가까운 곳에 300평정도 텃밭을 만들어 우리 가족이 먹을 야채를 농약을 쓰지 않고 직접 재배한다. 우리 식구가 먹기에도 많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줄 만큼 넉넉하게 땅은 베풀어준다.

아내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이 후회스럽다며 제주도를 가고 싶다고 하여 지인들과 함께 소원이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아내가 한 번도 새집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하여 새 집을 사서 이사도 했다. 내가 제일 두려운 것은 암이 아니라 아내가 절망하여 포기하고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음요법을 하는 곳을 알아내어 아내가 배우도록 하였다.

지금 아내는 평온하다. 아내 말로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비웠다고 한다. 투병한지 어언 8년이다. 최근 받은 검사에서는 이제 아내의 몸 안에서 암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부부는 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암은 기계 상의 수치로만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암과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일상은 암 이전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은 “돈 먹는 하마”이다. 병원에서 암환자가 아닌 이상 이제부터 아내에게 생기는 이상 징후로 병원을 찾을 때면 이제까지 받았던 암환자로의 혜택은 모두 사라진 셈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새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산을 오르며 어느새 산악회 총무가 되었다. 아내의 특기인 요리로 같이 산을 타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도 즐거워한다. 아내는 행복해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자신을 살렸다고, 남편의 사랑이 자신의 암을 녹였다고 한다. 매일매일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랍다고 한다.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는 암과 투병하며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첫 암 진단을 받고 입원실에 누워 있을 때 아내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찾아왔다. 아내 불교신자인데 그 친구는 아내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매일같이 새벽 기도를 나가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고 그의 기도에 감동받은 교회 교인들은 일요일 아내를 위해 모두 기도를 해주었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그 교회 목사님까지 오셔서 알지도 못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통합한의원 박상채 원장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아내가 한약을 먹으면서부터 몸의 면역력이 커졌는지 그 뒤로 암이 더 진행되지 않았고 우울했던 마음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서 수술을 해주었던 의사 선생님, 가족들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내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으니 앞으로 2년만 더 이렇게 아이처럼 살고 나머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고마움을 갚으며 살아가고 싶다한다. 나는 2년이 아니라 20년이라도 좋다. 아이로 지금처럼 건강하게 옆에만 있어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월간암(癌)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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