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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투병수기삶의 전환점을 맞으며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13년 05월 31일 19:20분596,949 읽음
김준성 | 부산거주 72년생 대장암 3기
2008년 12월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대장에 암이 발견되었고 1월에 대장암 수술을 하였다. 항암치료를 12회 받았고 그 후 먹는 항암약을 2년 정도 복용하였다. 모든 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어떤 치료를 선택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담당 의사의 지시에 의존하여 병원의 치료가 끝났다.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다시 직장에 복귀하였다. 암에 대한 모든 치료는 끝났다고 하였고 암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예전처럼 일상생활을 해도 괜찮다고 판단했었다. 또 의료진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덕분에 안심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암 수술로 대장과 직장을 15Cm 정도 잘라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편함은 있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 또한 적응해나갔다.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고 암에 대한 두려움도 무뎌져가면서 시간은 흘러 2012년이 되었다. 연초부터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아 생활이 불편할 정도였다. 자꾸 피곤하고 무기력했으며 등이 아픈 증상이 지속되었다. 혹시나 싶은 두려움에 병원에 찾아 증상을 호소하고 PET-CT를 찍었다. 그렇게 검사를 해봤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몸이 안 좋은 것이 분명했지만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괜찮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그해 9월에 다시 MRI로 검사를 하였다. 그런데 골반 옆 임파선에 암이 있음을 발견되었다. 병원의 모범생처럼 주는 약 다 먹고, 주기적으로 검사도 받고, 병원에서 시키는 모든 일들을 했는데 다시 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직장에 사정을 말하고 방사선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총 33번의 치료를 받았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암이란 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암에 대한 공부를 결심했다. 물론 이전에 암을 처음 진단 받았을 때에도 암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했었다. 주로 음식이나 식품과 관련된 내용의 공부였는데 막상 재발을 하고 보니 먹는 것만으로 암이 없어지는 식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먹는 것뿐만 아니라 암과 관련된 철학, 종교, 또 암을 나았다는 사람들의 책도 사서 정독하였다. 하지만, 어떤 책속에도 내가 찾는 답은 없었다. 나쁜 환경, 즉 담배, 술, 스트레스 등이 암의 원인이라고 추축만 할 뿐이지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책을 돈 받고 파는 사람들이 이상했고 무슨 이야기를 책에서 하는 것인 지도 모호했다. 결국 답은 내가 찾아야만 했다.
방사선 치료 후에 담당 주치의는 수술을 권유했다. 나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잘 해결 되리라 생각했는데 담당의사는 수술을 통해서 임파선을 제거하자는 논리였다. 남자로서 중요한 부분의 주변을 수술해야 하며 아주 위험한 수술일 수 있지만 주치의는 수술을 통한 암세포의 제거가 가장 확실하다며 수술을 권했던 것이다. 며칠간 고심했다. 중요한 일이고 잘못되면 남자로서의 구실도 못할 뿐 아니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도움을 하는데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인 의사에게 수술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그 친구조차도 수술을 찬성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담당의사의 뜻대로 수술을 결심하였다. 12월 27일이었다. 오후 3시에 수술실에 들어가서 밤 12시경에 수술실에서 깨어났다. 보통은 회복실이나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는데 예상보다 늦어졌고 더구나 의료진이 늦은 시간에 마취를 더 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는지 수술실에서 나를 깨웠다.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밖에서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수술실 밖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마취에서 깨고 나니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원래 수술을 마치고 나면 이렇게 통증이 심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술 침대를 끌고 가던 아내가 의료진에게 "옆에 약 병에서 호수가 빠져서 약이 새고 있는데 괜찮은가요?" 하고 물어 보았다. 알고 보니 그 약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극심한 통증을 줄여 주는 진통제였던 것이다. 그 약은 마약성분이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가져올 수 있는 약이 아니며 반드시 마취과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갖고 올 수 있던 약이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약을 처방해주는 의사가 나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골반 안쪽의 예민한 부분을 절개하여 암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는데 마취가 사라지면서 진통제 없이 온전히 그 통증을 참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 경험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그 고통을 마취제의 도움 없이 온전히 마주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투병하며 또 살아하며 생기는 여러 문제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통증을 이겨내면서 이것들은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과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20일 정도 입원하면서 몸은 차츰 회복되었다. 몸이 조금 살만해지니까 담당 의사는 또 다시 항암치료를 권유했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일들을 모범생처럼 잘한다고 해서 암이 나을 것이란 확신도 증거도 없는데 지금까지 암을 치료한답시고 나의 몸을 너무나 망가뜨려 왔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방사선치료를 33번이나 하였고, 장시간에 걸친 수술로 나의 몸과 마음은 지칠 데로 지쳐 있었는데 또 다시 항암치료를 하자는 것이다.
키는 183Cm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지만 지금은 몸무게가 70Kg을 조금 넘고 있다. 무려 30Kg이 넘게 살이 빠졌으며 암이 아니라 병원에서 진행하는 치료 때문에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병원의 암치료가 암을 잡는 게 아니고 사람을 잡는구나 라는 회의감에 젖었다. 결국 나는 의사의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암을 치료하면서 의사 말을 거부하기는 처음이었다.
다리가 제대로 굽혀지지 않아서 걷기도 불편했고 혼자서는 양말 한짝도 신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생활을 해야 했고 골반 안쪽의 암세포를 제거하면서 많은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집사람에게 남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아직 어린 자식들, 늙으신 홀어머니,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집사람이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이제 올 것이 온 거야!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라는 하나님의 뜻이야!'
나의 직장은 양주를 수입하고 유통하는 회사다. 이 회사를 10년 넘게 다녔는데 술을 유통하는 회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주하는 양이 남들보다는 많았다. 어떤 날은 낮에도 접대를 위해서 양주를 마시곤 했으며 거의 매일을 술과 함께 지내야했다. 또, 내가 술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집사람은 직장의 일이라서 말리지도 못하고 속이 많이 탔을 것이다.
종교는 암이 재발하고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나에게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 암환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닐까? 스스로가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립을 세우지 않으면 암을 이길 수 없다는 구절을 책에 보았다. 맞는 말이다. 암 자체가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암이 통증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모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의 몸에 암이 다시 재발하였다는 소식은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암은 곧 죽음이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암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런 죽음을 직면하였을 때 생기는 두려움이 무서웠다. 그러나 이제 그런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두려움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으며 몸도 서서히 회복되고 좋아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나에게 큰 힘이었으며 희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아버지 없이 성장하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암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면서 나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참담한 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딸과 아들을 보면서 행여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늘 두려웠다. 더구나 어머님께서 충격을 받으실까봐 차마 재발에 대한 얘기는 감추고 있었기에 누님과 집사람은 병원에서 퇴원하면 집으로 가지 말고 요양 시설에서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요양 시설과 근처에서 이름 있다고 하는 요양원을 방문하여 알아보고 있었다. 마지막 결정은 나의 몫이기 때문에 가족이 들려주는 정보를 갖고 결정해야 했다. 암환자를 위한 대부분의 요양시설은 주변 환경이 좋았지만 선뜻 신뢰가 가지 않았고 더구나 시설 면에서는 낙후되어 있는 곳도 많았다. 많은 고민 끝에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마더즈힐링센터를 선택했다. 처음 왔을 때는 그저 쉬기 위해서 왔을 뿐이었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새로 생긴 곳이다 보니 다른 요양원에 비해서 시설이 좋았다. 그때문에 이곳을 선택하였다. 니시요법이나 그런 것은 몰랐지만 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 '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하는 생각이 반반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풍욕, 냉온욕 등 니시요법을 알려 주는 대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풍욕을 하면서도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걸로 어떻게 암을 고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고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따라했다.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무릎이 굽어지지 않아서 양말조차 혼자 신기 어려웠는데 무릎이 자연스럽게 접어졌다. 더 놀란 사실은 의사가 앞으로 성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발기가 되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니시요법을 하면서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암도 나을 수 있겠구나!'니시요법을 하면서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이렇게 힘든 암 투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암을 낫게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의료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욕이나 냉온욕 같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진리구나 하는 생각들이다.
내가 재발할 당시에 뉴스에서 자주 보도된 내용 중에 하나가 성폭행범을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그자는 밤늦은 시간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들만 골라서 범죄를 저질러왔고 오랜 기간 동안 아주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다. 더구나 감옥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이었으며 감옥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그 뉴스를 보면서 지금의 내 상황과 나를 괴롭히는 암이 대입되었다. 나는 암이라는 놈을 무조건 나쁘다고 해서 감옥으로 보냈다. 방사선이나 항암주사 같은 방법을 동원하여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런데 항암치료나 방사선이 끝나면 암은 또다시 활개를 치고 내 몸을 망가뜨리는 더 큰 범죄를 저지른다. 계속 되풀이되는 이 악순환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쩌면 암이 내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내게는 큰 울림으로 암의 외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저주했던 내 몸 속의 암을 끌어안고 울었다.
암을 치료하면서 만난 의사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다. 나름대로의 철학과 원칙을 정해서 암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였다. 그러나 병원시스템은 환자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은행이다.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리고 정해진 치료를 받고 돈만 받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또 나는 VIP고객이 될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먹는 항암약을 평생 먹으라고 했기 때문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병원 시스템이 정말로 무섭게 느껴졌다.
건강해지고 있다. 몇 년 동안 암치료를 겪으면서 나의 심정과 주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또 국내의 암치료법은 명백하게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였다. 휴직 중인 직장에 다시 복귀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삶은 이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인생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누구도 나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다. 아마도 암은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닐까.
월간암(癌)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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