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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장수, 암을 만나다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13년 03월 31일 19:31분647,915 읽음

길정수 (48세) | 비인두암 4기

나의 직업은 두부장수다. 3일장이나 5일장 같은 시골장터를 따라 다니며 두부를 파는데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 쉽게 우리말로 풀이하면 장돌뱅이다. 두부를 팔며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게 일이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르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시골장에서 두부를 팔며 저녁에 시간이 있을 때는 취미로 탁구를 쳤다. 약 8년 전쯤인데, 그 때 같이 탁구를 치던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 나에게 계속 금연을 권유했다. 축농증은 아니지만 코와 그 부근에 계속 불편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의사선생님은 이런 상태가 계속 지속될 경우 상황이 매우 나빠질 것이란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던 중 당구를 배웠다. 탁구공과 공 모양이 비슷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구를 배운 후에는 장터에서 일이 끝나면 부리나케 당구장으로 향했다. 소위 말하는 '죽방'이라는 게임을 주로 했는데, 당구를 아는 사람들은 이 게임이 주는 높은 긴장감을 잘 알 것이다. 당구대 위에서 큐대를 떠난 당구공이 내가 원하는 공을 향해 달려갈 때의 스릴과 재미는 나에게 당구의 묘미와 높은 긴장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당구를 치면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당구 칠 때는 계속 담배를 물고 있어야 했다. 마흔 살도 넘은 총각이었고 취미생활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밤을 당구에 매달려서 지냈다. 이런 생활을 몇 년 동안 하였다.

2011년이었다. 목 뒤쪽 부근으로 작은 혹이 만져졌다. 동네 병원을 찾아서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담당 의사는 '악성신생물'이라고 말하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나도 그런가보다 하고는 부산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암이라고 얘기했으면 긴장했을 텐데 어려운 말을 잔뜩 늘어놓으니 나는 그저 조금 문제가 있나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처음 병원에서 '악성신생물'이라고만 이야기하고 '암'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산대병원에 방문하니 또 검사를 진행하려고 하기에 바로 담당자에게 쏘아 붙였다.

'아저씨 이거 다 방금 병원에서 한 것이고, 나는 암인지 아닌지 판별을 받으러 왔다. 왜 자꾸 했던 검사를 또 하려고 하느냐' 하면서 호통을 지르니 안에서 듣고 있던 의사가 들어오라고 한다.
담당의사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길정수씨 암입니다"한다. '암이면 암이지 뭐 이리 심각하게 이야기하노'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나의 암은 콧속에 큰 덩어리로 있으며, 뼈에도 어느 정도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이제 치료를 위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부위가 수술이 불가능한 부분이라서 항암과 방사선 요법이 주된 치료가 되었다. 얼굴 부위의 방사선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틀을 만들어야 된다. 방사선이 투여될 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안 되기 때문인데, 그 틀을 만들기 위해서 약 30분 정도 꼼짝달싹도 못하고 고정된 자세로 있어야 했다. 꼼짝도 못하고 억압된 자세로 있는 그 시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50여일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매일매일 방사선 치료를 하였고, 항암치료도 3회 정도 하였다. 병원을 퇴원해서 두 달 정도 지난 후에 다시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 보니, 일단 코 속에 있는 암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몸무게가 10Kg 이상 줄어들었다. '암 치료가 어렵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 암진단을 받고 나서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서울에 큰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장돌뱅이 생활을 하다 보니 보험도 여러 개 들어 놓은 게 있어서, 비용에 대한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암에 걸렸다고 서울로 가버리면 시장에서 하는 일들이 모두 멈추게 되고, 온 가족이 나 때문에 병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오래 살면 좋은 일이지만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또 죽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이사 가는 것밖에 안 된다. 쉽게 말해서 전입신고만 저쪽으로 하는 것이다.

처음의 암 치료가 잘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발하였다. 담당 의사는 아주 심각한 어조로 허리뼈로 암이 전이되었는데 항암 치료를 다시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바로 항암 주사를 맞았다. 처음에는 정말 충실하게 병원 치료만을 받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암에 뭐 좋은 게 없나'하고 인터넷이나 지인들을 통해서 알아보게 되었다. 작년 여름쯤에 후코이단이란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제품이 있었지만 일본 업체 중 하나인 "우미노시스쿠 후코이단" 제품을 선택하였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그 회사 제품을 구할 수 없어서 미국에서 국제택배로 받아서 먹었다. 다행히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지사가 생겨서 필요할 때 바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항암 치료는 입원해서 하는 치료가 아니기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시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 일을 하는 날이면 새벽부터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독한 항암치료제를 맞으면서 일을 하니 몸에 살은 없고 가죽만 남게 되었다. 남들이 봤을 때 '곧 가겠구나' 할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를 돕기 위해 나왔던 누님이 내 모습을 보고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몸에는 가죽밖에 남지 않았고 극심한 영양실조였다. 병원에서 영양제 맞고, 주사 몇 개 맞고 있는데 담당 의사는 입원치료를 권유했다. 나는 거절하고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병원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시장 바닥에서 일하는 것이 내 마음이 훨씬 편해서 그랬던 거 같다.

우미노시스쿠 후코이단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에 변화가 생겼다.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 섭취를 시작했는데, 항암 치료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무척 피곤하고 기력이 없었지만 이 제품을 먹고 나서는 피곤함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더구나 나는 몸이 조금 안 좋으면 변비가 생겼고 그 때문에 치질도 생기고 피도 많이 났지만, 대변을 보는 일도 수월해졌다. 항암 후유증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속은 항상 더부룩하고 거북했는데 그런 느낌도 많이 해소되었다.

더구나 음식을 먹는 일과 소화시키는 일이 항암 중임에도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잘 먹는 일이 가능해져서 몸보신을 해준다는 "영양탕"을 매일 저녁 먹었다. 암환자는 못 먹어서 영양실조로 간다는데 잘 먹게 되니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잘 먹고 잘 싸야 된다는 건데, 암환자는 무조건 잘 먹기보다는 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음식을 찾아서 먹어야 된다. 그러나 병원에서 항암 치료 중에는 이것저것 가릴 필요가 없다. 무조건 먹고 싶은 것을 찾아서 먹었다. 다행이 체력이 올라오고 무사히 항암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항암 치료가 끝나고 검사를 해보니 허리뼈에 전이된 암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옅어졌기 때문에 치료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병원에 갔을 때 담당의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제가 건강식품을 하나 먹고 있는데 혹시 후코이단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괜찮습니까?"
그러자 담당 의사가 "그런 거 안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의사로구만. 먹어서 내가 좋은데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한가.'

결국 병원에서 치료해주는 것 외에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암과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암에 걸리기 전에 나는 얼떨결에 결혼했다. 나의 신부는 모로코 여성이며, 나보다 스물두 살 어리다. 덕분에 KBS 다큐멘터리 "나는 모로코 여자와 결혼했다."에 출연했다. 모로코는 일부다처제 국가인데 한국 남자는 결혼하면 일편단심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는데 우리나라의 그런 풍습이 좋았던 것 같다. 더구나 모로코 문화는 다른 나라의 이슬람 사원에서 혼인 서약만하면 결혼이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의 아내는 한국에 도착한지 이틀 만에 나와 결혼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이슬람 사원에서 결혼서약을 한 것이다.

그리고 2010년에 가을에 예쁜 딸아이를 출산했다. 인형처럼 생긴 예쁜 내 딸이다. 얼마 전 의사가 했던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상황의 암환자가 1년 동안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라고 한다. 2명 중에 1명은 1년 안에 떠난다는 것이다. 2년이 지나면 살아남은 사람 중에 또 반이 가고 3년이 지나면 남아 있는 사람은 백 명 중에 두세 명 정도라는 것이다. 아이를 생각하면 내가 암과 투병하는 일을 잘 이끌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암을 떨쳐버리게 되었을 때 아내와 딸과 함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살다가 떠나게 되는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다음 생으로는 전입신고는 조금 미뤄두고 아내와 딸과 함께 이 생에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 일단 2년은 잘 버텼지 않는가. 2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 살아볼 생각이다.

월간암(癌)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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