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아버지가 주신 선물
김진하 기자 입력 2012년 08월 31일 12:56분754,365 읽음

글: 이건우

"따르릉! 따르르릉!"
"네! 복내전인치유센터입니다."
"저……. 입소문의 좀 하고 싶은데요. 저희 아버님이 많이 아프셔서……."
"전화 잘 주셨어요. 어디가 아프시고 어떠신가요?"
"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는데, 입소가 가능한가요?"
"네. 입소 가능합니다. 식사는 잘 하시는 편인가요?"
"입맛이 없어 하시기는 하지만, 반 공기 정도는 드십니다."
"입맛이 있을 때 입소하시는 게 환자 본인에게 훨씬 도움이 됩니다."
"저, 그런데 센터의 목표가 환자의 치유나 완쾌에 있는 건가요? 인생을 잘 마무리 하도록 돕는데 있는 건가요?"
"두 가지 모두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가족들과 상의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따듯하고 다정한 목소리! 뭔가 내 일처럼 달려와 줄 것 같은 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12년 4월 중순, 복내치유센터 이박행 원장님과의 첫 통화였다. 서울대학병원 암센터에서 상담을 마치고 막 나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의사들과 환자들이 병원 마당 벚꽃이 만개한 배경을 뒤로 저마다 사진 찍기가 한창이었다. 나만 이방인 같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활짝 웃는 사람들과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모두에게는 화사한 봄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느 겨울보다 가슴 시렸다. '아! 이 봄이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봄이란 말인가!' 왈칵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4월7일 청주 성모병원에 건강검진 차 입원하셨다. 몇 달 전부터 눈에 띄게 살이 빠져서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다. 아무이상이 없을 테니, 이참에 검진 받고 안심하자는 취지였다. 4월8일 오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써 울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아들! 병원으로 올 수 있어? 의사 선생님이 아들이 와서 검사결과 들어야 된대."
"어머니! 결과 나왔어요? 안 좋대요?"
"응."
"얼마나 안 좋대요?"
"아버지 암이래. 아무런 수술도 못할 정도래."
"아……. 알았어요. 일 마치고 바로 갈게요."

의사를 만나 암이 간을 80% 이상 덮고 있어서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의학적인 소견으로 3~6개월 정도 살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청년시절부터 헬스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과 체력에 정신과 마음도 건강하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압과 경락에도 능통하셔서 교회와 이웃들 중에 아프신 분들을 많이 치료해주고 자신도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셨던 분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암이라면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서울대학병원과 서울아산병원에 사진과 진료기록을 복사해서 달려갔다. 아버지가 가기 싫다 하셔서 할 수 없이 나 혼자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마찬가지! 다만 대형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의학적 진료방법을 최대한 시행해 보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은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담보 잡아 치료라는 이름으로 병원침대에 아버지를 묶어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암 관련 책자들을 뒤져가며 치료법을 찾아 헤맸다. 자연치유, 대체의학 관련 사이트와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자연치유와 대체의학을 병행하는 치유센터 몇 곳으로 마음이 모아졌다. 치료법은 대동소이 했다. 그러나 만약 완치가 불가능하다면, 아버지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복내전인치유센터였다. 더군다나 원장님 자신이 신장염과 간염을 앓았던 환자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처한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고 안내해 줄 것 같았다.

마음은 한시가 바쁜데 아버지는 이일저일 마무리하고 가시겠다며 입소를 자꾸만 늦추셨다. 아버지가 간암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버지께 도움이 될지 확신이 없었기에 달리 재촉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5월 첫째 주에 열리는 '힐링캠프'에 드디어 참가하게 되었다. 우선 일주일 경험해 보시고 장기입소를 결정하시겠다고 하셔서 모시고 내려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복내로 내려가는 길, 아버지는 평생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재밌던 분이셨던가? 나는 왜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가 간암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얼마나 웃으면서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힐링캠프 일주일!
그 시간은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간암 환자는 복수가 차서 다리가 퉁퉁 붓는데, 이 붓기가 거짓말처럼 다 빠져 사라지고 그 동안 배설되지 못했던 숙변을 쏟아내는 등 아버지는 일주일 만에 몰라보게 기력이 회복되셨다. 남들 다 가는 산책 갈 힘이 없어 센터 앞 잔디밭에서 잠깐 걷다 들어오는 게 고작이었는데, 마지막 날 저녁 골프연습장에 혼자 걸어가서 골프스윙 80회를 치고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과 활력이 채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셨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미리 아버지를 만나주신 것이라고 우리 가족은 믿고 있다.

캠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좋아하시던 간장 게장 단골집에 들려 식사하는데 거짓말처럼 밥 한 공기를 뚝딱 해 치우셨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입맛도 기력도 회복하셔서 우리 가족은 마치 아버지가 병이 완치되어 돌아온 것처럼 믿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간병 차 함께 참가하셨던 어머니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었던 말과 행동들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표현하여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다.

새벽기도 시간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자신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부끄러운 마음에 식사 시간에 어머니와 따로 앉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세미나 시간에는 시간마다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은혜를 받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떠나보낼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감사한 것은 아버지가 간암 말기라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던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어감을 인정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캠프 이전에는 무조건 아버지를 3~4년 더 살게 해 달라고 떼쓰며 기도했지만, 캠프 이후 기도가 바뀌었다. 아버지가 너무 많이 고통하지 않도록,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이 과정을 우리 가족 모두가 잘 지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캠프를 다녀온 후 나는 아버지께 장기 입소할 것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입소를 자꾸만 미루셨고 나는 그 태도가 못마땅했다. 아버지가 입소를 미뤘던 가장 큰 이유는 시골에 있는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아직 잔금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잔금 날짜는 6월15일 이었고 잔금 받으면 복내로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이 목까지 몰라왔다. '아버지! 지금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여유부릴 때가 아니에요. 아버지 암이라고요!' 그러나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더니 잔금 날짜를 5월24일로 당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후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책임까지 자기 손으로 마무리 하려 했다는 것을….

아버지의 바람대로 드디어 잔금을 받고 매매는 완료되었다. 매매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를 모시고 복내로 내려갈 마음 굴뚝같았지만, 아버지는 빈혈과 통증이 있어서 병원에서 며칠 쉬었다가 입소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하루가 급했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5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입원하셔서 며칠 쉬었다가 월요일 석가탄신일에 지난번처럼 기분 좋게 모시고 내려가려 했다. 주말 내내 이모들이 해온 음식 기분 좋게 드시고 잘 지내시다가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고 하루를 고통하시다가 5월30일 수요일 아버지는 천국으로 떠나셨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께 간암이라고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장례 후 어머니께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간암이라는 사실과 얼마 못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들 힘들어할까봐 철저히 모른 척 하시면서 "이제 쉬면서 요양하면 금방 회복할 거야" 라고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죽어감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 과정이 억지로 참아내며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셨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 준비를 위해 복내전인치유센터를 알게 하시고 캠프에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은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이박행 원장님과 사모님, 센터직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투병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합니다.

후일담 하나! 운명하시던 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누워 계셨다. 중환자실이라서 가족들이 교대로 자리를 지켰는데 내가 지키고 있던 시간 갑자기 맥박을 표시하는 숫자가 90대에서 30대로 떨어졌다. 다급해진 나는 간호사를 불렀다. 이내 당직의사가 달려왔다.
"임종을 준비하셔야겠습니다. 가족들을 모두 부르시죠."
아직도 난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길 원했던 것일까? 다시 좀 어떻게 해 봐 달라고 아이처럼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을 놓칠까봐 내 다리는 벌써 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한 사람씩 아버지와 안녕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여보! 그 동안 고마웠어. 고생 많았어. 미안해. 이제 편히 눈 감고 좋은 데서 쉬어!"
어머니는 아버지 볼을 어루만지며 아버지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의 눈물이 아버지의 두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갑자기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30대로 떨어졌던 맥박수가 다시 80대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우리 가족은 모두 놀랐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잠시 가졌지만 맥박수는 다시 떨어졌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를 아버지가 들으셨다고 믿는다. 평생을 함께 해 준 아내의 목소리와 눈물,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와 마음을 받으셨다는 표시가 아니었을까! 사람이 죽어갈 때,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것이 청력이라는데 의식은 잃었지만 평생을 들어왔던 목소리와 피부결,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보내는 마음을 아버지는 느끼셨던 게 아닐까!

내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아직 이런 사진과 인사말을 적어놓았다.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중환자실에서 아버지 손 꼭 붙잡고 찍어두었던 사진과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이 글을 쓰는데 마치 아버지가 옆에서 보고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환하게 웃으시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것만 같다.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금 눈물이 난다. 아버지는 영원히 내 가슴에 함께 있다.

"아버지! 많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월간암(癌)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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