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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가져다 준 선물, 개똥쑥
김진하 기자 입력 2012년 03월 26일 15:27분852,009 읽음

최도근 | 2007년 대장암

나의 고향은 전남 영광 법성포이다. 이제 나이는 예순 셋이요, 두 아들은 장성하여 각자 사회에서 나름대로 몫을 해내고 있다. 암환자로 투병기를 적고 있지만 실상 나의 삶은 암 발병 이전부터 투쟁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은 남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더 앞날을 내다보고 다소 힘들더라도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이라도 나왔으면 승진도 더 할 수 있고 좋은 대우를 받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첫 직장에서 18년간을 근무하고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다. 관리직이었는데 대학을 나온 친구들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그 한계에 무심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작은 가게를 얻어 포부를 갖고 나만의 일을 시작했다. 조그만 장사였지만 직장생활만 하던 나에게 개인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장사도 그만두었고 궁리끝에 당시 중동에 건설 붐을 타고 있었던 대우개발에 취업하여 중동 리비아로 가서 건설직으로 30개월을 일했다.

쏘아대는 뙤약볕에서 내내 일하는 것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외로움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외화를 번다는 자부심과 고국에 있는 처와 자식을 생각하며 견딜 수 있었다. 중동에서 30개월을 근무하고 귀국하였는데, 그만 외국에서 그 고생을 해서 번 돈을 모두 사기를 당해서 날리게 되었다. 친한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결국은 한 푼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낙심한 나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전라도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서 처음으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택시운전은 무척 힘든 노동이었다. 그런데 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처우는 터무니없이 열악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부당함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 광주에서 택시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택시노동조합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시청과 회사를 상대로 택시운전사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다. 일하는 시간에는 운전을 하고 남들은 퇴근하는 시간에 나는 시위를 하러 가는 고된 투쟁의 나날이었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택시노조는 회사와 정부의 골칫덩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의 노동자연맹 때문인지 더 처우가 좋아지는 상황이었지만 택시 노동자들은 그와 반대로 더 궁핍해져갔다. 거대한 절벽에 외쳐대는 나의 절규는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의 한 몸을 바치면 택시 노동자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좋아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게 되었다.

1997년 10월 7일. 잊을 수 없는 날. 나는 최후의 선택으로 시청 앞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택시 노동자들의 합당한 대우를 이끌고자 함이었다. 죽을 각오를 하였고 죽기를 원했지만 나의 목숨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나를 받아주지 않으셨고 허락하지 않으셨다. 눈을 떠보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전신은 3도 화상. 상상할 수 없는 통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기절을 했고 이제 대학에 갓 들어간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화상으로 다 타버린 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화상으로 인한 투쟁이었다. 참으로 길고도 긴 투병의 길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그나마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도 있고 농사도 지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특히 가족들, 아들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나의 큰아들은 언제나 전교 일등을 하던 우등생이었다. 한 번도 학교에서 일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아이는 나름 큰 꿈을 갖고 서울의 법대에 응시했고 합격했지만, 광주에 있는 전남대를 갔다. 대학 면접에 누군가 아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너의 아버지가 맨날 빨간 띠를 두르고 데모를 하는데, 나중에 법관이 된다면 그런 아버지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

아들은 그 질문에 네 라고 대답하지 않았고 꿈을 접고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집안 형편을 생각하여 지방으로 대학을 지원하여 직장인이 되었다.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지금은 둘 다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은 너무도 애통하고 한스럽다.

분신 후 화상 치료를 하고 몸이 겨우 움직일 형편이 되자 나는 계속 택시노동자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회사는 불법적으로 나를 해고하였고 어느 택시회사에서도 취직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빨간 딱지가 붙어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그즈음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돈을 벌면서 아들들이 제일 먼저 선물한 것이 개인택시였다. 택시운전 경력이 있으니 조건도 맞았고 노조와 관계없이 택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2005년 일이었다. 아들들이 마련해 준 개인택시로 일을 하니 기분은 하늘을 날듯 행복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몸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내 앉아서 운전만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화장실을 가도 볼 일을 다 못 본 느낌이었다. 치질이 있나 싶어 동네 작은 병원에 갔다. 의사는 딱 보자마자 사진만 한 장 찍어 주고는 이 사진을 들고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이미 암은 몸에 여기저기 퍼져 있었던 것이다.

광주에 있는 전남대 병원을 갔다.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나는 담당의사에게 우격다짐으로 수술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수술을 하고 지루한 항암이 시작되었다. 속은 메스꺼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못 먹으로 죽는다'라는 생각으로 모래처럼 껄끄러운 음식을 입에 무조건 쑤셔 넣고는 삼켰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고 씹는 것조차 고역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해도 밥 한 공기를 다 먹을 수조차 없었다. 항암이 끝나자 이번에는 방사선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38번에 걸쳐서 방사선을 하였다.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암과 싸우며 2007년을 보냈다.

수술과 항암, 방사선까지 모두 마쳤지만 암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은 간으로 전이되었다. 간의 겉과 속이 모두 암으로 퍼져있다고 했다. 다시 간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였다. 온몸에 있는 불그죽죽한 화상 자국에 복부에는 두 번이나 그어댄 수술 자국이 길게 자리잡아 내 몸은 눈뜨고는 차마 못볼만큼 처참한 만신창이의 몸이 되었버렸다. 아. 그런데도 하늘은 나를 아직은 오지 말라고 하셨다. 화상의 고통과 화상 치료라는 긴 투병의 시간 끝자락에 기다리던 암은 나를 무던히도 괴롭혔지만 내 목숨은 꺾이지 않았다. 다시 살라는 하늘의 메시지였다.

나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전이되고 지금까지 암에 좋다는 그 어떤 제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돈도 없었을 뿐더러 나의 처지가 그렇게 호강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 절제수술이 끝나고 지인 한 분이 개똥쑥이 암에 좋으니 한 번 구해서 먹어보라는 정보를 주었다.

귀가 솔깃하여 수소문을 해서 개똥쑥을 알아보니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이 너무도 비싼 값을 요구했다. 그렇게 비싼 개똥쑥을 계속 사먹을 형편이 아닌데 개똥쑥은 왠지 먹어보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한번 직접 캐보자 싶어서 전국 산을 돌아다니면서 개똥쑥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개똥쑥을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인터넷에서는 지천에 널려 있는 게 개똥쑥이라던데 왜 이렇게 찾기가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똥쑥 씨를 구해서 농사를 지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2009년 지금 살고 있는 전남 곡성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어렵사리 개똥쑥 씨를 조금 구해서 농사지을 준비를 하였다. 개똥쑥 농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할까. 씨를 뿌리고 정성껏 가꾸니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노력하고 공들인 결과 2010년과 2011년에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개똥쑥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여기저기서 개똥쑥을 보내달라는 전화가 온다. 나와 같이 어려운 환우들과 나누어 먹기도 하고, 힘들게 농사지었다며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가져가기도 한다. 개똥쑥 재배에 푹 빠져 지내느라 병원에는 검사 이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었고 농사일이 몸이 많이 필요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고 생소한 분야고 달리 도움일 청할 곳도 없어 시행착오를 겪으며 계속 연구해야 했다.
암 투병이니 관리니 그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저 밥 먹고 일하고 개똥쑥만 달여서 먹었을 뿐이다. 최근 병원 검사에서는 개똥쑥의 효과인지 하늘의 도움인지 몸에는 암이 없고 깨끗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금 창고에 쌓여 있는 개똥쑥을 둘러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자취가 여기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옳다고 생각하고 부당한 것에는 굴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 모든 것이 개똥쑥을 만나게 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올해부터는 또다시 개똥쑥과의 새로운 시작이다. 곡성군에서 지원을 해줘서 본격적으로 개똥쑥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영농조합법인을 만든 것이다. 나를 살게 해준 개똥쑥이 많은 사람들의 건강도 다시 되찾게 해줄 수 있기를 꿈을 꾼다. 그리고 그 생명을 살리는 길에 함께 서 있을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 힘든 일이 오면 실컷 울되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일을 하자.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면 더 좋다.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살 길이 열린다.

월간암(癌)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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