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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습을 결정할 때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6월 27일 16:35분879,856 읽음

우리는 마음속에 스스로에 대하여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여진 기억과, 느낌들, 기쁨, 슬픔, 분노 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서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 모습은 기억에 의해서 쌓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쌓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통 "자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자아"라는 모습이 만들어지는 방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고, 마음속에 문제들을 발견하여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자아"라고 하는 어떤 이미지는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특성일지 모르지만, 모든 생명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영혼이야말로 진실된 나의 모습입니다. 간단하게 "참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울하고, 슬프고, 외롭고 하는 감정들은 나의 내면에 있는 자아가 느끼는 감정들입니다. 더욱이 신에게 버림받은 느낌은 절망의 상태이지만 결국 '자아'가 느끼는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아는 처음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부정적인 느낌이나, 기억들에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최초의 기억들은 혼자 있거나, 어머니, 아버지의 싸움이나 혼나는 기억이 많습니다. '자아'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먹고 크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채우고 있는 부정적인 원인 중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은 과거 어떤 행동을 기억하면서 후회스러운 부분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기억 중에서 추억과 후회가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회스러운 기억을 많이 하며, 그에 따른 죄책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선(善)하다고 여기는 것만을 추구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인간은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며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들이 선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 되기, 성공, 권력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죄의 엄밀한 의미는 '오류(error)'입니다. 길 가다 침을 한 번 뱉고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이는 오류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한 죄책감과 후회는 부정성의 자아를 먹여 살립니다. 또한 과도한 죄책감은 병적인 완벽주의를 만들고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이 나를 공격할 수 있으며, 타인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죄책감은 또 다른 형태의 자만심이라고 그의 연구 논문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자만심이나 자부심이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이 끝나고 나서 '나는 좀 더 잘 했어야 했어'라는 마음가짐이 바로 자만심 혹은 자부심입니다. 또는 어떤 일이 아주 잘 되었을 때 그 일이 자기 자신 때문에 잘 되었다는 평가입니다. 힘의 원천을 신성이 아닌 자아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좀 더 잘 했어야 했어'라는 의미는 이미 논리적으로 거짓인 가설입니다. 따라서 스스로가 죄책감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은 스스로의 '부정적 자아'를 살찌우는 일이며 이런 상태로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이 흐른다면 결국 괴로운 삶 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자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불하는 대가에 의해서 항상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당한 일로 괴로움을 겪고, 순교를 당하고, 오해 받고, 삶의 끝없는 피해자 노릇을 합니다. 심지어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자아는 이런 노릇하는 것을 사랑할 뿐입니다. 자아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동정, 자기 연민, 자만심, 등. 자아는 모욕과 냉대를 차곡차곡 쌓아 두고 상처받은 느낌을 간직하고 불의를 수집합니다. 그리고 자아의 마지막은 언제나 공격으로 끝이 납니다. 그 공격이 나를 향하든지, 남을 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심리학에서 죄책감을 덜어 내는 과정을 '취소'라고 합니다. 취소는 양심을 불러내 보다 현실적인 인생관으로 바꿔 놓는 일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오류에 대한 보상을 통해서 보다 온건하고, 덜 시비 분별적이고 덜 처벌적이 됩니다.

"정당한 분노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풀어 보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위의 문구들은 산 속에 기거하며 도를 닦는 스님이나 수도원의 사제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이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속삭입니다.
자아는 신문, 텔레비전, 뉴스, 권리, 불의, 윤리 등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들을 자동으로 찾아서 그곳에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적인 관심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만약 암에 걸려서 치유가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자아의 유일한 에너지원인 부정성이라는 단물을 원하느냐, 아니면 포기하기를 원하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정의 핵심이며 이러한 결정 없이는 어떠한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생에서 단 한 번의 기회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이생을 통틀어서 이런 결정을 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치유를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에게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한 번 되새겨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월간암(癌)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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