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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해야 할 마지막 시간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4월 30일 14:56분877,444 읽음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지 6년 후 에린에게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처음엔 가벼운 두통으로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되찾은 행복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왔다. 암의 재발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속에서 다시 암세포가 발견되었고 안면 골격과 두개골이 손상을 입었다. 한때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수술이 시행되었고, 담당의의 메스는 그녀의 얼굴 오른쪽 상당 부분 절개해 냈다. 다시 화학 요법이라는 고통의 계단을 올라야 했고, 절망이 커질수록 투여된 약품들도 점점 더 독해져갔다. 그녀의 시간과 인생은 화학요법의 순환을 통해 표시되었다.

어떤 방향도 가리키지 않은 채 무심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에린의 주치의에게서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의학적 치료도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린이 나를 찾아왔다. 간호사로서, 동료로서, 인생의 스승으로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환자의 자격으로 내 방을 노크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의 종양을 치료할 수도, 삶을 연장시킬 수도 없었다. 아주 사소한 통증 하나도 줄여줄 수 없었다.

“제가 선생님을 찾아온 건 진단과 처방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의 여행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선생님을 뵈면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 그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에린,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그토록 에린에게서 많은 도움과 힘을 얻어왔는데, 정작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린의 미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눈빛은 단 한 순간도 날 피하지 않았다.
“지난 제 삶에서 저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리고 아직도 배울 게 아주 많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감사해요. 선생님을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게 삶을 되찾아 주고자 노력하셨다는 점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또 배웠어요. 죽음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요. 즉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죽음을 이기려고 애쓴다는 거예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겨가면서 말이죠.”
그녀는 죽음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삶에의 열망과 의지가 강건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와 자세라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왜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왔는지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죽음 앞
에서도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고자 했다.

“에린, 우리를 위해 당신이 인생에서 배운 것들을 나눠줄 수 있겠소?”
에린은 평화와 고요함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인생을 살려면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하고 더 나아질 기회를 발견하게 되죠. 그래야만 죽음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란 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앞에 펼쳐질 삶을 전혀 몰랐듯이 말이에요.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에게 다음 세상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죽음이든 삶이든간에, 우리는 언제나 미지의 시간,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여행을 성공적으로 이어가려면, 죽음을 어떤 단절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죽음은 우리가 무릅써야 할 위험도 아니요, 참된 인생을 방해하는 걸림돌도 아니라는 걸요. 죽음은 다시 힘찬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라는 걸요. 그래서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마지막 시간이라는 걸요.”

의사로서 나는 늘 치료와 치유를 동일시해 왔다. 하지만 치료와 치유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에린을 통해 깨달았다. 에린은 치료되지 못했지만, 치유되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감화시키고 밝혀주는 아름다운 에너지였고, 베풂을 통해 풍요한 인생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성장하는 두 딸을 위해 암세포를 모두 이겨냈고, 그들이 훌륭하게 자란 다음에는 다시 찾아온 암세포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에린은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준 고귀한 영혼으로서 새로운 삶의 여행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세상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상처받고 버림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병원을 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안녕히….”

<생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 윌리엄 하블리첼, 브리즈

월간암(癌) 201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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