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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편지 - 다시 주어진 일 년을 맞이하며
고정혁 기자 입력 2010년 12월 04일 16:31분878,332 읽음

나는 불안해하지 않고
나는 화내지 않고
나는 무서워하지 않고
나는 슬퍼하지 않고
나는 나에게 정직하고
나는 나와 모든 이에게 정직하고
나는 유쾌하고
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암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위의 마음가짐은 암환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마음의 다짐을 공책에 적어놓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마음먹기 나름이라지만 이런 좋은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엔 세상사가 녹록지가 않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 앞에 등불로, 암에 걸린 처지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격인 사자성어가 아닌가 합니다. 한 해를 선물 받고 기뻐하기 전에 이 해가 저물 때까지 과연 살아있을까 하는 기약 없는 현실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임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면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이라 하더라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월간암(癌)>을 발행하는 암환자지원센터에서는 매월 정기모임, 부정기적으로 캠프나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참석하시는 분 중에는 초보 암환자도 있고, 롱런하고 있는 고참 암환자들도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고참 암환자가 초보 암환자에게 그간의 투병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초보들은 이런 고참의 투병이야기가 무슨 무용담을 듣는 것 같다고 합니다. 무용담은 영웅의 전투이야기입니다. 고참 암환자들의 진단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내온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강한 의지와 눈물 없이는 지금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 고참 암환자는 통증 때문에 자살 시도를 두 번이나 시도했고, 또 녹즙-시중에서 파는 채소가 아닌 산과 들에서 채취한 산야초로-을 중심으로 하루 3리터까지 복용하며 완전 채식으로 7년 넘게 건강을 지키는 사람, 항암제 후유증으로 혈변을 3년 내리쏟다가 기적처럼 나아버린 사람, 산에서 죽겠다고 산으로만 기어서 올라가더니 에베레스트까지 다녀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진정 무용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웅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야기입니다.
암으로 투병한다는 것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과정과 매한가지입니다. 모두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자기와의 전투에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암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죽음의 나락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를 구해내고 자신의 삶을 되찾은 그들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리고 무용담의 주인공인 영웅이 되려면 위에 언급한 마음가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같은 마음을 갖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사람이 드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무용담의 주인공인 고참 암환자들은 위와 같은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으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다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전직 대통령들의 서거를 비롯하여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해였으며 그 충격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서를 보면 “삶과 죽음도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닌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월간암(癌)>을 만들며 접한 중에 가장 훌륭한 의미를 담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살아 있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모두 자연의 섭리이며 죽음이 섭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은 때로는 삶의 방향으로 큰 뜻으로 이끄는 전환점이 되기도 하며, 자연이 내려준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큰 어려움 없이 무용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암과 투병하는 어느 고참의 방에 들어서니 “나는 암환자다”라는 글귀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놓았습니다. “왜 이런 걸 붙여 놓았습니까?”라고 물으니 “암에 걸린 지 오래되어 내가 암환자라는 걸 자꾸 잊어버려”서라고 말하며 “암환자는 암환자의 생활이 있는데, 몸이 다시 건강해지니 자신도 모르게 다시 예전의 버릇이 나와서 이렇게 붙여 놓고는 아침마다 ‘나는 암환자다’라고 다시금 생각한다”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암에 한 번 걸리면 평생을 관리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심란한 일들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암과의 투병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새해를 맞는 일은 큰 축복입니다. 앞으로 채워나갈 365일은 위의 마음을 하루하루 새롭게 다져가는 날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월간암(癌)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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