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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투병수기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희망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18년 10월 30일 16:15분7,646 읽음
이선주 | 61세 위암·폐암
1995년도에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편이 하늘로 떠났다. 내가 38살이던 그 해, 어린 아이 둘을 남겨 놓고 갑작스럽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렸다. 1981년 부산에서 울주군으로 시집을 와서 아이를 낳고 남편이 가꾸어 가는 종돈장을 돌보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왔지만 무심한 하늘은 나의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데리고 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이별 후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고 남편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용기를 내야 된다고 거듭 생각했지만 수시로 생각나는 그이의 모습, 목소리, 숨결은 나를 더욱 혹독한 그리움으로 이끌었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남편과 함께 했던 기억들만 떠올랐다. 아이들이 학교 운동회를 할 때 옆에 빈 의자가 보이면 이 자리에는 그이가 있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의 기일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까마득해져서 장을 보러 가기도 아득했다. 간신히 시장을 나갔지만 어느새 길가에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동네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병원에 갈 때면 나서서 모셔다 드리고 진료가 끝나면 모셔오곤 했다. 남편이 없는 빈자리는 나만 슬픈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슬프게 만들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세월이 흐르면서 깊은 슬픔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흐르는 눈물도 점점 횟수가 줄어갔다.
남편은 종돈장을 제법 규모 있게 운영했는데 갑자기 그 일이 있고 나서 내가 떠맡아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여자가 거친 일을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점점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같이 일해 왔던 건장한 남자들이 위협을 주는 지경이 되었다.
돼지를 시장에 내다 팔고 늦은 시간이라 은행 문이 닫혀서 어쩔 수 없이 돈을 집으로 갖고 오는 날이면 같이 일하는 남자들이 그 돈을 훔쳐가는 등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남편이 물려 준 사업장을 어떻게 해서든지 운영하려고 버텼지만 결국은 접게 되었다. 겁이 나서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남편의 사업장을 넘기고 나는 온전히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였다. 남편이 떠나고 2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사업을 접으니 마음은 편해졌고 온전히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였다. 아이들 학교에서 봉사하는 일에 즐거움을 두면서 생활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지나면서 슬픔은 조금씩 무뎌졌고 약해졌다.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은 모두 성장하였고 자신들의 일을 찾아 열심히 사는 모습이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여기에 봉사하는 기쁨도 알게 되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동네에 기거하는 어르신들을 돌보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2017년 5월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건강보험의 정기건강검진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위한 검사를 하면서 폐에도 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암도 무서운데 폐암까지 있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먹먹했고 눈물로 온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먼저 위암 수술을 받았다. 6월 7일. 그리고 그 해 말까지 나는 밥을 한 수저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60Kg 정도였던 몸무게는 39Kg까지 줄어들어 피골이 상접했다. 미음도 제대로 못 넘기는 날이 석 달 가량 이어지니까 병원에서는 다시 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위와 연결되는 십이지장의 구멍이 너무 좁다면서 두 번째 수술로 십이지장 확장술을 받았다. 몸은 갈수록 형편없어지는 와중에 폐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폐암 수술을 하면서 연결 되어 있는 호수를 뽑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면서 다시 하자고 했다.
몇 달 사이에 나는 위암 수술, 십이지장 확장술, 폐암 수술, 또 폐와 관련된 수술 등 4번의 대수술을 견뎌야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서 영양주사로만 버티는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다. 혈당이 낮아져서 쇼크가 오기도 했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고 어디 바늘구멍만큼이라도 살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밤 통증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야위어 가는 몸뚱이를 보면서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까지 살아야만 할까’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몸이 망가지면서 마음도 점점 약해져갔다. 몸은 이미 한계에 치달아서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정신을 까무룩 잃는 일이 잦았다. 영양주사만으로 버티던 몸이 저혈당이 와서 더 이상 버티지를 못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위암과 폐암 모두 초기에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는 수술에 문제가 생겨서 재수술을 하면서 몸이 망가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너무 심할 때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도 통증이 덜해지면 그 가느다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수술 때문이니까 이제 먹을 수 있게 되면, 기운만 차리면 다시 건강해지리라. 이것이 유일하게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초기인 암에, 약해진 체력 때문에 남들 다 맞는 항암주사도 맞지 않았다. 만약 항암주사까지 강행군을 했다면 생명은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담당의사도 그 점을 알았는지 아직까지 항암주사 이야기는 없다.
혼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미음도 제대로 못 떠먹는 형편이지만 다행히 집과 가까운 곳에 암환자를 위한 전문병원이 문을 열었다. 편히 쉬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있는 이곳 파인힐 병원에서 올해 4월부터 투병을 시작하였다. 여전히 미음도 못 먹는 상태였고 힘들었지만 아이들 때문에 나는 살아야했다.
힘이 없어서 걷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도 일주일 정도는 입원실 문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처음 해보는 암병원의 생활이었지만 같은 처지의 암환자라서 그런지 서로 마음을 터놓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위로해 주고 위로 받으니 가족 같았다.
이 곳에서는 아침이면 모두 모여서 산에 운동을 갔다. 나는 성치 않은 몸이라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함께 따라가고 싶고 어울리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여기에서 처음 배운 것이지만 눈을 뜨면 풍욕이라는 것을 제일 처음 시작한다. 기운은 없었고 무슨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 하는 대로 옆에서 무조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마음이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속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그전에는 미음 한 숟가락이라도 넘기려면 어김없이 구토가 나고 배가 편치 않았는데 11개월 만에 처음으로 음식을 먹고 아무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정말 기적이었다.
그리고 미음에서 점점 굳은 음식으로, 그리고 지금은 남들이 먹는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인힐병원에 머물고 석 달 만에 이 놀라운 모든 과정이 일어났다.
이제 아침이면 다른 사람들과 산에 가서 힘들지 않을 정도로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몸무게도 서서히 올라서 42Kg이 되었다. 아직 기운 없고 힘들지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운이 나면서 여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큰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왁자지껄한 그 속에 나도 끼어서 함께 어울리며 웃는 행복이라니.
아직 회복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작은 희망의 씨앗이 생겼다. 이제는 작은 씨앗이 점점 자라나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다시 건강을 찾게 되면 나처럼 아픈 분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일을 찾아서 봉사하는 삶을 꿈꾼다.
파인힐병원의 특별한 점은 음식과 프로그램이다. 근처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재료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음식을 조리해 준다. 내가 처음 왔을 때 미음을 주었지만 매번 나의 상태를 체크하면서 입맛 돋우는 음식으로 조리해서 갖다 주었다. 프로그램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빽빽한 일정이 있는데 주변의 크고 작은 산과 온천을 이용한 활동 그리고 자연치유 요법에 근거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보다시피 만점이다. 내가 일어나서 걸어 다니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분위기이다. 동병상련이라고 모두들 서로를 위로하고 보호하고 걱정하면서 지내는 그 마음들이 모여서 치유가 되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아쉽게도 입원할 수 있는 병상이 몇 개 되지 않아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투병의 시작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도와주신 파인힐 병원 김진목 원장님과 그 외 직원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고맙습니다.월간암(癌)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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