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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요법, 나를 기적으로 이끌다
임정예 기자 입력 2016년 06월 01일 12:25분15,364 읽음
허성화(60세) |대장암 4기



경기도 안성에서 천안으로 시집을 왔다. 35년전 일이다. 천안에서 배농사를 하는 천안의 성환에서 배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종가집의 종부로 일이 많았지만 남들처럼 오순도순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그러나 암이라는 병이 남편과 나에게 차례대로 찾아오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암은 두렵거나 미운 대상이 아니었고 투병하는 이 시간이 삶에 감사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연속인 암 속에서 나는 기적과 기쁨의 매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삶의 변화는 2004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은 방광암을 진단 받고 투병을 시작하였다. 시름시름 앓기만 하던 남편은 병원을 전전했지만 요로결석이나 전립선 비대증으로 진단을 받았고 치료를 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의사 선생님을 보고는 수소문해서 찾아가 검사를 하고 결국 방광암으로 병명이 밝혀졌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행히 매우 초기의 상태이기 때문에 치료가능성이 높다고 담당 의료진이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때부터 나는 남편의 병수발과 과수원에서 농사짓는 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 남자가 해야 될 일부터 내가 해야 될 일까지 일복이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남편은 암과 투병 중이고 시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환자 둘의 병간호와 집안일에 치여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시아버지는 결국 일 년 반 정도 후에 먼 길을 떠나셨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수발을 들면서 보낸 시간이 참으로 야속하고 힘이 들었지만 결국 나의 일이었기 때문에 힘이 들어도 참으면서 인고의 시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쌓였던 피로가 쌓여 내게 암이라는 병을 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남편은 다행히 2009년에 완치판정을 받았다. 초기에 발견이 되어서 치료 결과가 좋았다.

2013년 남편을 따라서 병원을 갔다. 남편은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고 나는 그냥 따라갔을 뿐이다. 그렇지만 병원에 왔으니 뭐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대장암 검진을 받았다. 우리의 교회에 자주 봉사활동을 오시는 의사선생님이 운영하는 병원이었기 때문에 아무 부담 없이 검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의사선생님이 잠시 병원에서 보자는 전화연락이 왔다. 내심 걱정이 약간 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의사선생님은 내 눈길도 피하고 말도 머뭇거리기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할 말 있으면 빨리 말씀하세요. 걱정하지 마시구요.”
그제야 선생님은 호흡을 가다듬고 암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나고 심지어는 기절도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위로의 말을 하는데 나는 대답했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휴가를 주셨군요.”

그렇게 암투병이 시작되었다. 진단을 받을 당시 암은 2기와 3기 사이에 있었고 다행히 위치가 상행결장에 있기 때문에 수술하기가 수월했으며 소위 말하는 매우 착한 암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 수술을 했고 항암은 6회 하자는 담당 의료진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항암 치료가 5회 정도 진행되었을 때 온몸에 암이 전이가 되었다. 그래서 처음 치료를 받던 병원을 나와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암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암이 너무 빨리, 그리고 모든 장기에 순식간에 퍼졌기 때문에 매우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14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몸속에 있던 장기들을 항암약으로 씻어내는 작업이었다. 그 후 12회에 걸쳐서 항암치료를 진행하였다.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고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화장실이었다. 하루에 화장실을 오간 횟수가 50번 정도였는데 차라리 화장실에서 살았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당했다. 화장실에서 잠도 잤으니 말이다. 그렇게 12번의 항암치료가 끝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상생활을 하였지만 암환자로서 받아야 하는 정기검진은 다니고 있었다.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담당의사는 차트를 보고는 언제나 좋지 않다는 말과 더 나빠지고 있다는 말만 할 뿐 나에게 힘이 되는 말 한마디, 긍정적이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은 일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물었다.
“나는 괜찮은데 왜 자꾸 안 좋다는 말씀만 하세요?”
그 말에 의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CT사진이나 그동안의 차트를 볼 뿐이었다. 

결국 복막에 전이가 되었고 다시 개복을 해서 수술을 하자는 이야기를 한다. 201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그날 나는 세 번째 개복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내가 앞으로 살 수 있을지, 여기서 죽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담당의사의 말을 믿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지금 병원을 몇 년째 다니고 있는데 몸은 더 안 좋아지고 있다. 내가 죽는다 하여도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병원을 나가야 한다.’

세 번째 수술이 끝나고 삶의 끈을 부여잡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병원을 나가기 위해서는 의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병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워서 숨을 쉬는 일과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병원을 나갈 작전을 세웠다. 

아침에 담당 의사가 회진을 올 시간이 되면 간병인에게 부탁하여 예쁘게 화장을 하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꼿꼿이 앉아있었다. 의사에게 건강하게 보여서 “지금 퇴원합시다”라는 말이 나오게끔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료진은 “항암 합시다” 라는 말로 나를 더욱 상처받게 만들었다. 지금 몸 상태에서 더해지는 항암치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12월 말일이 되었을 때 모든 의료진이 퇴근하고 나는 몰래 병원을 기어 나오다시피 빠져나왔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집으로 가면 나를 간호해 줄 사람이 없을뿐더러 가족도 나도 불편해지기에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주변에 요양을 하면서 몸을 치료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여러 곳을 검색한 결과 눈에 띄는 한 곳을 발견했다. 충북 제천에 있는 니시치유센터였다. 니시라는 생소한 치유법이었지만 손태경 원장과 인연이 닿아서 올해 1월 2일 입소하였다.

이곳으로 오는 날은 마치 내가 죽으러 가는 날인 것처럼 식구들과 동네의 지인들이 모두 이곳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 엉엉 우는 사람들 속에 나도 덩달아 숙연해지는데 그때 모두 나와는 영원한 이별을 마음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고 수술의 후유증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곳으로 오면서 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다. 바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내 생의 길을 담담하게 걷고자 하는 결심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약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곳에서 진행하는 니시치유법에 집중하고 싶었다. 

지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홀로 남았다. 초라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있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삼일 밤낮을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손태경 원장님과 사모님은 내 모습이 너무 위험해 보여서 식구들에게 연락하여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그리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사모님은 밥을 날라다 주셨는데 매번 먹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내야 했다. 그렇게 3일 정도가 지나니 너무나 미안해서 어느 순간 다음번에 밥을 날라다 주면 먹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밥을 한 술 뜨니 몸에 서서히 기운이 생겼다. 잘 먹는 게 보답이다. 어떻게든 밥을 삼켜야지. 밥을 갖다 주는데 고마워해야지. 이런 마음 덕분인지 식사를 조금씩 하고 몸을 추스를 기운이 생겨나니 프로그램을 따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이곳에는 산의 중턱에 내 몸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교회가 있다. 처음 목표는 거기까지 걸어가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교회를 향해서 눈 위를 걷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가다가 쉬고 가기를 반복해서 결국 교회에 다다랐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기도하고 찬양했다. 입소하고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다음날부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짜여 있는 니시요법의 시간표를 따라했다. 이를 악물고 무엇이든 시키는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했다. 냉온욕, 모관운동, 풍욕, 산책 등 하루의 일과가 매우 바쁘게 지나갔다.

깊은 산속에서 숨을 쉬면서 좋은 생각을 갖고 며칠을 지냈을 뿐인데 몸은 금방 알아차리고 다시 건강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병원을 나와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작은 소망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먹어야지, 삼켜야지, 고마워해야지, 걸어야지 등이었다. 사망의 골짜기를 걷다가 다시 생명의 빛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 나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누워서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을 떠올렸다. 나를 사용하기 위해서 이런 역경을 경험하게 만드셨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니시요법의 도움과 의지로 몸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이었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기적이 생긴 것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풍욕부터 시작한다. 깊은 숲속에서 하는 풍욕은 몸과 마음을 깨우고 개끗이 씻어준다. 아침 외에도 풍욕은 시간이 날때마다 한다. 그리고 냉온욕과 모관운동을 하고 숲속 길을 걷는다. 저녁 5시 반에 저녁을 먹을 때까지 바쁜 일과가 지나간다. 

다시 컨디션이 좋아지고 보니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나를 후회 없이 살 수 있게 하고 무엇이든지 아멘하고 가겠다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곳 니시치유센터는 나에게만큼은 기적의 공간이 되었다. 모두 나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곳의 자연환경과 니치요법은 반드시 우리를 좋은 쪽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나의 기적적인 체험이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해본다.

지난날 병원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회진을 온 의사의 말에 남편은 사색이 되었다.
“지금 항암치료를 하는데 언제까지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약이 안 들으면 약을 바꾸어서 다른 약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무언가가 보이는데 한 번 더 개복을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화가 났고 마음속에는 독기가 생겼다.
‘내가 쥐야! 자기 배가 아니라고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냐!!’
이런 독기와 오기가 나를 지금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나니 마음은 편안해지고 몸은 점점 치유되어 가고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지역에서 봉사도 많이 했고 장관에게 상도 받았다. 이제 내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은 더욱 봉사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웃으면서 즐겁게 지내는 일상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냈던 일상이지만 앞으로도 지켜야 하는 일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오늘 하루를 지낸다.

월간암(癌)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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