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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투병수기고통도 주고 꿈도 이뤄준 암(癌)고정혁 기자 입력 2015년 08월 31일 17:33분21,251 읽음
박정숙(59) | 난관암
2014년 12월 말,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난관암 진단을 받았다. 흔히 나팔관이라고 하는 곳에 암이 생긴 것이다. 내가 걸린 암은 흩날리는 씨앗처럼 퍼져 나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활성화된 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발견 당시 난관과 주변의 부위뿐만 아니라 직장에도 암이 번져 있는 상태였다.
암이 어느 날 갑자기 옮거나 해서 생기는 병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암에 걸렸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2009년경 류머티즘 관절염이 생겨서 당시 한양대 병원 류머티스 센터를 찾았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나서 담당 의료진의 설명은 당시로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금 류머티즘이 문제가 아니라 몸의 체온을 조절하는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으며 앞으로 더 큰 병이 찾아올 수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 약 6개월 정도 복용하고 나니 몸이 많이 좋아졌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몸이 어느 정도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당시만 해도 견딜 수 없이 통증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몸의 변화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았다. 서서히 몸은 변해 갔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랫배가 울리면서 묵직하게 아파왔다. 그러면서 폐경이 되었는데 하혈이 가끔 있었다. 병원에 방문하여 소파수술을 시행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랫배가 아프던 것이 옆구리로 옮겼고 나중에는 허리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이 번지면서 생활에 큰 불편을 줄 정도였다.
결국 동네 내과병원을 찾았는데 담당 의료진은 내과의 문제는 아닌 듯하니 산부인과 방문을 권유했다. 산부인과에서 내시경 초음파 검사를 시행했다. 누워서 의료진과 같이 화면을 보는데, 내가 보기에도 하얀색의 이상한 부위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동네 병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고 의료진은 큰 병원의 방문을 권유했다.
원자력 병원으로 향했다. 모든 검사를 다시 했는데 담당 의료진은 암인지 아닌지는 현재 판단하기 어렵고 개복을 하고 수술을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만약 일반 종양이면 수술 시간이 두 시간 정도 걸릴 것이고, 악성 종양이면 수술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고 매우 길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수술이 진행되었고 총 6시간이 걸렸다. 수술 도중에 보호자를 불러서 상황을 설명하면서 수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CT상에 안 보이는 암들이 있었고 난관뿐만 아니라 직장에도 암이 퍼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난소, 난관은 모두 절제하고 임파선의 일부와 직장의 벽에 붙어 있는 암을 제거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이 끝난 후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받아 들여야 했다.
나는 결혼하고 방광염, 골반염, 자궁염 등의 질환을 몸에 달고 살았는데 치료를 위해서 항생제를 달고 살았다. 그때의 치료 때문인지 몰라도 평소에 백혈구 수치가 2,000대를 오가며 매우 낮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수술이 끝나고 담당 의료진은 6회의 항암화학요법을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여겨 유언장을 쓰고 들어갔는데 무사히 살아서 수술실을 나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의 몸 상태로 다시 항암화학요법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어서 의사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니 몸이 좋아지면 그 때 다시 와서 항암제를 맞겠습니다.”
나의 말에 담당 의료진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못하겠다는데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술이 끝난 후 열흘 만에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지금까지 항암화학요법은 시행하지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의 암환자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치료하는 사람들,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암의 전이와 재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병원에 있는 동안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과 생활을 직접 목격하였다. 마지막에는 병원에 누워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런 과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내가 증거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양쪽 팔을 식구들에게 부축 받으며 전남 보성에 있는 복내전인치유센터로 향했다. 약 2년 전에 제부가 신장암으로 투병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곳이었고, 자연과 함께 좀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병원을 나오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복내전인치유센터에서 여러 암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더는 할 수 있을게 없어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5년이 지나서 완치 판정을 받았는데 재발한 분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노력했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몸을 너무 사랑한다는 마음, 식사를 할 때마다 그 음식을 앞에 놓고 생각한다. 이 음식의 좋은 영양소들이 나에게 들어와 나의 세포가 살아나게 해준다는 믿음으로 식사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풍욕을 할 때도 나의 몸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되뇐다.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남편은 식품도매유통 사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가정을 지키며 살아오다가 2010년경부터 남편의 사업장에 출근하여 경리 업무를 보면서 사업을 도와주었다. 집에 있을 때 남편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그런가 보다 신랑이 힘이 드는구나 이정도만 생각해 왔는데 막상 그 사업장에서 경리 업무를 보게 되니 사업의 내용을 훤히 알게 되면서 점점 더 커다란 스트레스에 빠지게 되었다.
돈을 벌면 그나마 괜찮지만 계속되는 적자를 보면서 스트레스의 강도는 더 커졌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비자금으로 숨겨놓은 돈까지 사업에 쏟아 부어야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고 비례해서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몇 년 전부터 서울이 싫어졌다. 운전하기도 싫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의 꿈은 공기 좋은 시골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었는데 신랑의 의견은 나와 달랐다. 사업체도 서울에 있고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왔는데 시골에 들어가 사는 것이 내키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암에 걸리고 나서 결국 남편은 나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양평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있다. 앞으로 3개월쯤 지나면 나무로 지은 새집에 입주할 수 있다.
나는 투병과 일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잘 되면 좋겠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홀가분하다. 20년 넘게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사실 그동안 소홀한 면이 있었지만 암과 투병이 시작되면서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었다. 죽고 사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가슴 속 깊이 깨달으면서 살아간다.
얼마 전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의료진은 나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씨익 웃으면서 검사 결과를 설명해 주는데 아직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 한다. 아마도 항암치료를 거부한 것에 대한 어떤 뉘앙스를 주는 것이겠지만 다시 항암제를 맞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친절한 의사선생님이다.
암과 투병하면서 식구들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도 모두 바뀌었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내가 결혼한 지 벌써 33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장녀로 자랐고 남편도 장남이다. 나보다 세 살 위의 남편은 뭐든지 자신의 방식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이 있었고, 자신의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행동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말을 잘 듣는다. 처음 암을 진단 받았을 당시에 남편은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암과 상황을 알고는 점점 더 두려움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여태 우리 부부는 떨어져 생활해 본적이 없는데 이별 아닌 이별을 하여 나는 혼자서 투병을 하고, 남편은 밖에서 사업을 하며 집에서는 주부 생활을 하고 있다. 딸들은 모두 출가했기 때문에 남편과 아들, 두 남자가 집에서 지낸다. 부자간에 서먹했을 텐데 이제는 서로 생존을 위해서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편은 집안일을 하면서 주부의 힘든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찌개를 끓이고, 쓰레기를 버리고, 집 청소를 하면서 그 일의 소중함과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양평에 있는 “황토옥구들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연 속에 있는 좋은 시설에서 맛깔스럽게 차려 주는 밥을 먹으며, 주변의 산을 산책하고 기도하고 명상하고 온전히 나의 몸과 마음을 위한 시간을 지내고 있다. 지금껏 살면서 나는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늘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게 지내왔다. 삶이 그러했다. 암에 걸려서 대수술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마음을 비우게 되었고 나를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
이곳 “황토옥구들방”에는 50명 정도의 암 동지들이 있다. 같이 암을 투병하는 동지로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다. 모두 다시 건강을 찾아가고 있으며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분들과 지내면서 나 스스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마음가짐이 긍정적이 마음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전과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면서 식구들도 많은 위안을 갖게 되는 듯하다.
이제는 잠을 잘 잔다. 최근에도 밤에 화장실을 다니느라, 또 통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그 때문에 하루의 일과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잠들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와 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이 든다. 편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꿀처럼 달게 지나간다.
암과 같이 사는 것은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완주를 목표로 마라톤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하루 충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게 되면 어느 날 마라톤 완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완주를 위해서는 마음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 나의 병을 인정하고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처음에는 기도하면서 무척 많은 눈물을 흘렸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찾아 왔나 원망스럽고 가족들이 보고 싶고 외로워서 울었다. 그러나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맑기도 하고 구름이 잔뜩 낄 때가 있다. 나에게는 신앙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제 새집이 지어지면 내가 오래 전부터 자연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꿈을 드디어 이룰 수 있다. 암은 고통도 주었지만 내게 꿈을 이루게도 해주었다.월간암(癌)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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