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간암을 겪으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다
김진하 기자 입력 2014년 12월 31일 18:38분148,100 읽음

글: 장영철(간암 54세)

나는 격렬하고 힘든 운동을 하는 유도선수였다.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간염 보균자라는 것은 건강에 있어서 그다지 커다란 이슈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게 있구나' 정도였지 간염 때문에 병원을 다니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B형 간염 보균자라고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던 터여서 그냥 운동 열심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어디서 감염이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런 것이 내 몸속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어머니께서는 무엇인가 걱정스러우셨는지 서울대병원의 유명한 의사에게 예약을 해놓으시고는 시간 맞춰서 병원을 찾아가 보라고 일러주셨다. 대학시절 흘러가듯 간염에 걸렸다는 말을 했었는데 어머니는 영 마음에 걸리셨던것 같다. 마침 나도 여전히 운동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체력이 확연하게 떨어지는 것을 느끼던 차였기 때문에 별다른 반감 없이 예약한 날짜에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그때가 80년대 후반쯤이었다. 병원이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쑥스러웠지만 떨어지는 체력의 원인이나 알아보자는 심정이었다. 병원에 가니 각종 검사가 진행되었다. 혈액검사, 소변검사, 손으로 만지는 촉진검사 등 담당의사는 정성껏 검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B형 간염 확진을 받았다.

그제야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운동선수들이 간염에 많이 걸린다는 것과 운동하다 그만 두는 선수 중에 많은 사람들이 행여 간염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B형 간염에 걸렸고 보균자라는 인식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 후 운동을 그만 두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더불어 B형 간염 치료가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주는 아주 많은 종류의 약을 한 움큼씩 먹었다. 당시에 내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불가능이었다. 지금도 바라쿠르드 같은 약이 개발 되었다곤 하지만 역시 치료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저 병원에서 주는 약을 수십 년 동안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 B형 간염이 병으로 그리 심각하게 진행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병원의 의사선생님 말씀만 따르면 된다는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라미뷰딘은 원래 에이즈를 치료하기 위한 항바이러스 치료제이다. 당시에는 매우 고가의 약품이었는데 의사들은 이 약을 처방 받아 먹기를 권했는데, 처음 접해서 먹을 때는 바이러스 수치가 정상에 근접할 정도로 많이 낮아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약은 내성이 생겨서 더 이상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내 몸 속에서 없애기 위해서 라미뷰딘, 인터페론, 제픽스, 바라쿠르드 등의 약들을 수십 년 동안 복용했다. 그래도 바이러스는 끄떡도 없이 몸에서 버티고 있었다. B형 간염 투병 시간이 길어질수록 B형 간염에 대해 나는 의사보다 더 박사가 되었다.

보통 B형 간염은 간경화나 간암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바이러스는 없어지지 않으니 나 또한 간경화나 간암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기적인 검사를 3개월마다 강북삼성병원에서 받고 있었다. 결국 2012년 9월에 올 것이 왔다. MRI와 CT촬영을 통해서 간에 약 1Cm 크기의 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준비를 잘해왔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암 진단을 받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수술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틀이 지나서 병원으로부터 받은 연락은 간에 1Cm 크기의 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 전체에 아주 조그마한 암세포들이 모두 퍼져 있어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암이 수술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치명적일 경우에만 그렇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주변의 지인들 중에 암과 관련된 의사들에게 연락해서 자세히 물어 보았다. 간과 관련해서 나 또한 박사였지만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정확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물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갈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친구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길지 않을 거라는 암시만 했을 뿐이었다.

수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색전술을 시술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총 4번의 색전술과 2번의 고주파시술을 받았다. 2번째쯤 색전술을 시술하면서 담당 의사는 나에게 "생체 간이식"을 검토해보자고 권유했다. 그 당시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간 일부를 내게 이식하고 인공으로 담도를 연결하는 수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1억 이상이 비용이 드는 고가의 수술이고 나와 아들이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지만 병을 완치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로 논의를 했었다.

이런 논의는 나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담당 병원의 의견과 함께 다른 병원의 의견도 듣고 싶어서 2013년 6월 18일 서울아산병원 간이식 팀을 내방하였다. 궁금한 몇 가지를 그곳 담당의사에게 문의했다.
"간이식을 검토하고 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곳의 자문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간이식을 하면 살 수 있는가? 간이식 수술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그 팀의 답은 명료하게 다가왔다.
"간에 다발성으로 암이 생겨서 장담할 수 없다. 간이식을 하고 1년이 지난 시점에 또 다시 암이 생기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런 의견을 제시하면서 몇 가지 다른 시스템으로 간을 전체적으로 스캔한 후에 색전술을 시도해보자고 서울아산병원의 담당의사가 권유했다.

나는 우선 그들이 간에 대하여 전문적인 팀을 이루고 치료를 해왔기 때문에 신뢰했고 그곳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3번째 색전술을 위해 시술대 앞에 섰다. 이전에도 색전술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술이 끝나고 난 후에 어떤 느낌이고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략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시술이 끝나고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느끼며 병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온몸에 불같은 열이 확 올라왔고 집사람은 몸에 알코올을 바르면서 열을 식히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결국 정신을 잃었다. 피에 균이 들어가는 패혈증이 된 것이다.

집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간에 얼마나 염증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CT검사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담당 의료진은 나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후 3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다. 혈소판, 백혈구 등의 수치가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고 중환자실의 담당 의사는 집사람을 불러 '기적이 없는 한 남편은 깨어나기 어렵다 설령 깨어난다 해도 신장투석을 평생 해야 된다' 라는 말을 전했다. 집사람은 커다란 충격 속에서도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하고 집안에도 연락하면서 행여 있을 불상사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저승사자를 본 것 같기도 했던 그 3일을 집사람은 모두 기록해 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입에는 호흡기가 있어서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조그만 화이트보드를 쥐어 주었는데 세 글자 이상 쓰기가 어려웠다. 집사람의 기록을 보면 혼수상태의 원인은 색전술을 할 때 약이 과다 투여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중환자실의 담당의사가 이야기 한 내용이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과 가족은 병원의 과실 때문에 매우 분노한 상태였지만 나는 조용히 집사람을 불러 말했다.
"내가 이제 이렇게 깨어났으니 그 문제로 병원에 항의 하지 말자."
그렇게 이 문제를 조용히 넘어갔다.

중환자실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기계식 호흡이었다. 입에 커다란 호스가 들어와서 가슴을 조여서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담당 의료진에게 호흡기를 빼달라고 하니 수치가 불안정해서 못 뺀다고 하기에 화이트보드에 몇 글자를 썼다.
"당신들이 안 빼면 지금 내 손으로 빼겠다."

이 메시지와 나의 눈빛을 보고는 커다란 호스와 호흡기를 빼내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있던 노폐물, 가래, 약들이 한꺼번에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원래 있던 병원으로 가서 색전술을 한 번 더 받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치료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 이런 치료를 하면서 죽음의 길로 가는구나.'
이제 병원의 치료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산에 들어가서 민들레나 끓여 먹다 죽는 게 지금 하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는 생각에 시골에 땅도 알아보며 산에 들어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찮게 나와 비슷한 사례의 글을 읽게 되었고 글 속에 나오는 한의원을 알아보았다. 박치완 연구원장이 있는 생명나눔한의원이었다. 바로 예약을 하고 박치완 연구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박 연구원장은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지금 상태에서 아무 것도 안한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소신껏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
"길게는 3년에서 4년 짧게는 2년 정도."
박 연구원장은 뜻밖에도 내게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리고 박치완 연구원장과 함께 치료를 시작했다. 혈뇨를 10일 이상 보았다. 말 그대로 고름이 소변으로 나올 정도였다. 혈뇨를 볼 때는 허리부터 시작해서 아랫도리의 통증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차차 지나면서 다시 맑은 소변이 되었다. 또 간암 환자는 오른쪽 어깨가 항상 아프다. 색전술과 고주파 치료를 받으면서 그쪽의 신경이 많이 손상되기 때문인데 어느 순간 오른쪽 어깨가 가볍게 되었다. 두달 남짓의 시간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바꾸었다. 3일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긴 후로는 채식주의자처럼 되었다. 또, 아는 지인이 하얀 민들레가 좋다고 하여 차처럼 다려 먹는다. 음식은 몸에 좋은 것만 먹기보다는 나쁜 것을 먹지 말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삶의 질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숨을 쉬고 있다는 연명의 차원이 아닌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환자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다. 해답을 고민하면서 투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월간암(癌)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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