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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준 휴식, 삶을 뒤돌아 보다
임정예 기자 입력 2014년 01월 30일 13:09분389,688 읽음
석명숙(51) | 경남 창원시

나의 고향은 경북 예천이다. 어렸을 적에 대부분 시골집이 그러하듯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형제는 많고 가난했다. 8남매로 그 중 가운데였다. 언니가 둘, 오빠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은 셋이었다. 형제도 많고 동네에도 아이들은 많았다. 나는 아이를 유독 좋아해서 동네 애들까지 모두 집에 데려와 놀곤 했다. 지금도 아이만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집안 형편도 어렵고 또 나보다 공부 잘하는 형제들이 있어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출이 아닌 출가를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일이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모험이 가능했을 것이다. 무작정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지금은 창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마산이라는 곳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

어두컴컴한 저녁, 마산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고 보니 갈 곳도 없고 막막했다. 터미널 앞에 있는 택시를 타고 현재 처지를 설명하고서는 무작정 시장에서 아동복을 파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만약 나쁜 마음을 갖고 있는 택시 기사였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으나 다행히도 재래시장에서 아동복 판매하는 가게 앞에 내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마운 택시기사였으며,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도 다른 운명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좋았기 때문에 아동복을 판매하는 상점에서 일을 배우면서 이곳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히 시장 어귀에서 아동복을 판매하는 사장님께서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점원으로 채용해주셨다. 첫 직장에서 많은 일들을 배웠다. 한 달에 몇 번은 서울에 있는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 같이 가서 물건도 떼어 오곤 했는데, 사장님 덕분에 마산에 정착하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을 일을 하다가 문득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선택한 것이 미용이었다. 같이 배우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동생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같이 일하는 언니에서 시누이가 된 것이다.

남편은 누나가 둘이고 외아들이었으며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집에서 하는 말은 몇 마디 안 되었고 코미디 프로에서 나오는 것처럼 “밥 먹자”, “자자” 딱 이정도의 스타일이었다. 친정에서는 결혼을 극구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딸과 아들을 낳아서 이제 곧 있으면 딸아이가 시집을 간다. 참 세월은 빨리도 흐르는구나 싶었다.

장사도 하고 직장도 다니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남편도 직장을 열심히 다녔지만 바깥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아이들 키우는 일과 살림은 대부분의 나의 몫이었다. 때로는 남편에게 섭섭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식구들 뒷바라지를 묵묵히 하였다. 다행히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이후로는 돈 한 푼 안들이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2011년에 일주일 넘게 설사를 하였다. 기운이 없고 피곤하여 병원에 입원할 지경까지 되었다. 입원하고서는 많은 검사를 하였다. 대장내시경, 위내시경 피검사 등. 췌장수치가 너무 높았다. 목도 자주 잠기고 피곤함이 늘 가시지 않았다. 며칠 후 검사 결과는 갑상선암으로 진단되었다. 눈앞이 까맣고 머릿속은 하얗게 되었지만 암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했다. 조직검사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 담당 의사는 수술이 가능하니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서울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은 “올라와서 치료 받자” 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누나! 갑상선 암은 서울에서 감기 걸린 환자처럼 취급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나는 서울에 갈 생각을 접었다. 서울에서는 별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병을 갖고 동생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가 싫었고 , 그렇게 별것이 아니라면 이곳에서도 치료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하고 불과 두달 정도 지나 암 진단을 받았었다. 수술 당일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정거장으로 걸어가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느라 애를 썼다. 식구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려고 홀로 병원을 갔다. 계속 눈물이 흘러서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눈물을 닦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태어나서 수술이라는 것을 처음 받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암수술이었다. 다행히 우측 갑상선 한쪽만을 제거했다. 의사 말로는 쌀알이 불어있는 크기 정도라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 한 달 동안 몸을 추스르고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에 나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벌써 5년이 되었다. 암에 걸렸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직장을 다녔다. 수술이 끝나고 처음 몇 달은 사람을 만나기가 싫었다. 그냥 집에만 있고 싶었지만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울감 같은 느낌이 계속되었고 이렇게 언짢은 기분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아이들과 지내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우울함이 덜해졌다.

암환자라고 너무 자신의 몸만 챙기려고 집에만 있기보다는 일이건 운동이건 계속 움직이고 식사 때 되면 제때에 밥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일을 먼저 하려고 했다. 또 몸에 좋다는 건강보조식품보다는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었다.

지금은 직장은 퇴직하고 3개월 정도 창원 마산에 한울한방병원에서 입원해서 지내고 있다. 항상 우울하고 생활에 활력이 없었는데 이곳에 지내면서 많이 밝아졌음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이 병원에서는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에 잠들 때까지 암환자들 위한 빽빽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크게 몸의 해독과 면역력을 올리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에 따른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또 암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한의사의 지도에 따라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다.
덕분에 치유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퇴원을 하여도 지속적으로 이용할 계획이다. 목욕탕, 뜸, 음식, 좌훈 등의 시설이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지방에서 암을 투병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병원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암이 내게 준 휴식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바쁘게 사느라고 돌보지 못한 내 몸과 마음을 여기에서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고 만져주고 사랑해주라고 하는가보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여기서 찬찬히 지난날을 돌아보니 정작 내 몸은 방치되어 있었다. 이제는 제대로 몸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 주어져서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는 무엇보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
월간암(癌)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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