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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치유] 일취월장(日就月將)하라!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7월 06일 13:17분879,377 읽음

이글을 읽는 독자가 천주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라면 이렇게 기도해 보자.
‘주여, 저를 살피사 깊은 내면의 저와 대화하게 하소서. 내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있음을 주께서는 이미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시는 그 적을 나로 하여 알게 하소서. 알게 하신 후에는 그 적을 이해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계획이심을 대화하고 타협하고 종국에는 치게 하셔서 깨닫게 하소서. 내 안의 내가 죽어야 주께서 온전히 거하시고, 그 길이 주의 종 제가 사는 길임을 잊지 않도록 주여, 강경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불교 신자라면 이렇게 기도해보자.
‘내 안에 계신 불성(佛性)이여, 참다운 나의 본령(本領)이여, 그나마 아직 버티고 계신다면, 제발, 나의 무심함을 용서하소서. 다급해진 이 처량한 날, 이제야 당신을 찾는 나를 도우소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종국에는 그 마음도 버리게 하소서. 삼보에 귀의하옵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만약 아무 종교가 없는 아교(我敎)라면 마음에 이렇게 각인해보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약함은 이제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용기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의연히 이 세상을 헤쳐나갈 것이다.’

이제 이러한 기도로써 하루하루를 시작해보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만들어 온 것이다. 실제로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 그중에서 아주 질이 나쁜 내가 만들어온 현실이다. 위의 기도를 통하여 내 속에 있는 ‘나’ 중에서 질이 나쁜 ‘나’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질이 나쁜 ‘나’는 어떤 게 있을까?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에서 뉴스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나쁜 ‘나’를 토대로 만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보지만 내 속에 있는 ‘나쁜 나’는 그런 소식으로 불행을 전이 받는다. 이는 가치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우리의 심성을 나쁜 쪽으로 이끌어간다. 사람들 대부분은 선과 악 중에서 악(惡)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 중에서 선한 것보다는 악한 것에 더 많은 관심과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스컴은 ‘선의 내용’보다는 ‘악을 담은 내용’의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넉넉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여도 그런 마음이 지속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나쁜 쪽이 커지고 나쁜 생각과 행동으로 바뀌어 간다.

보통의 강인한 마음이 아니면 본래의 선한 마음을 지켜내기란 어렵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불행이라는 병에 전염되어 악한 세포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지금 바로 눈을 감고 자신을 바라보자. 현재 나에게 주어진 문제는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것인가를 떠올려 본다. 암환자라면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떠올려보자. 과거 어느 시점에서 지금 이 시점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무엇 때문에 이 큰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불행의 전염을 따라가는 따라쟁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전달받는 세포보다 불행을 전달받는 세포의 힘이 월등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선보다는 악을, 희망보다는 절망을, 살려고 하는 의지보다는 스스로 죽어가는 불행을 따라가고 있었다.

죽음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의 주변을 배회한다. 하지만 가난하거나 병들었다고 모두 죽음에 사냥 당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우리에게 긴장, 두려움, 혼란, 가난, 고독, 분노, 좌절, 포기, 이 여덟 개의 계단을 마련해 놓고 저 위에서 우리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내 위치가 어디인지, 저 여덟 계단 중에 어디에 올라서 있는지 자문해보라. 자신의 위치가 파악되었다면 어떻게 이 계단을 벗어날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여덟 계단의 마음상태는 이와 같다.

긴장 -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무슨 수를 써야 하는데. 여보, 어떻게 하지?
두려움 - 아, 어떻게 하지? 정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지?
혼란 - 여보, 이제 어쩌지? 당신은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뭘 했어?
가난 - 이제 이렇게는 안 되겠어. 난 이렇게는 못살아!
고독 - 난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왔어. 그런데 내가 왜 이래야만 하는 거야?
분노 - 나쁜 사람,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모든 게 그 사람 때문이야. 다 그 사람들 때문이라고!
좌절 - 여모! 내 아들, 내 딸아!
포기 - 이건 내 삶이 아냐. 제발 이제 나를 그만 괴롭혀. 난 이제 고개 들 힘조차 없단 말이야.

많은 사람들은 저 여덟 계단 중 어디에도 서 있지 않다. 그러나 암과 같이 위중한 병에 걸리거나 부도가 나고 사기를 당하는 등 상처가 깊은 사람일수록 높은 단계에 올라서게 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이 흐르다 보면 죽음에 사냥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더 높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 이미 몸에 생겨버린 암세포들? 몸에 새겨진 수술자국? 남아있는 목숨의 시간을 세어보는 일? 되풀이되는 치료에 바싹 까칠해진 피부를 쳐다보는 것? 언제쯤 전이될까 상상해 보는 것?

죽음을 전제로 하는 암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암이 뒤덮은 악몽 같은 현실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암에 걸린 현재 가장 분명한 것은 끝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점점 그 세력을 넓혀가는 존재는 ‘암’이 아닌 우리 내면의 불안, 걱정, 염려, 막연함, 두려움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파악해서 어디를 새 출발선(New Start Line)으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맹점은 현실에 혹독하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현실을 직시하려고 해도 바로 코앞의 현상밖에는 볼 수 없다. 바로 우리에게는 ‘암’이 현실이다. 지금의 현실인 암환자라는 사실이 아무리 혹독하고 힘들지언정 우리는 현실인 ‘암’에게 휘둘리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직 암만 바라보고 암만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시선을 암에서 나로, 암을 이겨내야 하는 내 몸으로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것이다. 일취월장을 위해서는 나를, 내 속에 있는 나쁜 나를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를 버려야지만 나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나를 뛰어넘어야 지금 생긴 큰 문제를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생긴 큰 문제는 과거의 나였으며, 지금부터 나는 나의 나쁜 세포를 버리려고 노력하겠다고 이 순간 결심해야 한다. 위에 언급한 기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 나쁜 말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무관한 사건이다. 내 마음이 그런 나쁜 생각의 파장에 전이되는 것은 몸에 암이 전이되는 것보다 훨씬 해롭게 작용한다.

의사가 당신의 남은 시간은 6개월뿐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사의 것일 뿐이다. 나의 몸을 해치는 나쁜 말의 전이를 허용하는 것은 나쁜 말이 실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 몸을 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싸우고 이겨나가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나만이 아니다. 어느 암환자인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다급하고 절박해도 포기의 덫에서 빠져나와 확신과 삶에의 의지를 다져야 한다. 암과 싸우는 것은 약이 아닌 내 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의 출발은 ‘나’이며, ‘나’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를 가두어 둔 암이라는 덫을 훌쩍 뛰어넘어 일취월장(日就月將)하라.

월간암(癌)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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