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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치유] 평화로운 죽음을 위한 마음가짐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7월 01일 13:08분878,785 읽음

고동탄 | 발행인

2009년 1월26일,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작은어머니 속을 무던히 상하게 하셨지만 임종하실 때는 집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야기도 듣고 저와 사촌 동생들의 손을 꼭 잡으시고는 뭔가 할 말을 남겨둔 듯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떠나셨습니다. 작은아버지의 임종과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 죽음 자체를 끔찍하게 여기고 회피하려 드는 사회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은 탄생과 더불어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고자 여러 준비를 하고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듯 마찬가지로 죽음은 한 인생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며 아름다운 작별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평화로운 죽음 맞이할 수 없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이 외롭고 기계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로 앞둔 사람들은 집에 있다가도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저의 작은아버님은 집에서 임종하셨지만, 임종을 하고 나서도 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습니다. 설날 아침 의사가 있는 곳은 병원의 응급실뿐이며,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있어야지만 장례식장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들이 응급실에 도착하면 곧바로 혈액을 채취하거나 심전도를 검사하는 등 바쁜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일 것이고 이러한 검사를 받는 상태에서 의사와 가족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환자의 심리적인 부분이나 요구사항 등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울뿐더러, 모든 결정은 환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말기 상태에서 죽음을 직면에 둔 환자는 의료상인 행위보다는 휴식과 평화를 원하는 데 죽음은 실패로 받아들여지는 현재의 의료과정은 환자의 심장 박동, 맥박, 심전도 등 각종 검사장비와 이를 검사하는 의료진만 환자에게 가까이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든 생명을 연장하려는 노력이겠지만 그 상황에서 환자가 소생한다 한들 여명이 남지 않은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서 임종을 맞게 됩니다. 아마도 현실을, 혹은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의료시스템이 아닐까요? 암과 같은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들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불안감을 억누르려는 우리의 방어적인 모습은 아닐까요?

각종 의료 기기와 혈압에 집착하는 것이, 다가올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은 아닐까요? 죽음에 대한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기계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인류의 나약함, 한계, 실패,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일깨워 주는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얼굴보다 기계가 훨씬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점점 더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방향을 다시 설정하여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방향전환을 위하여 사회가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의 불안감을 가중시킨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적과 직접 만나서 정정당당하게 싸워 스스로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과 직접 마주 서서 정정당당하게 싸울 때 스스로의 자존감을 느끼고 그것으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정정당당하게 싸울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미사일 한 방의 폭격이 수천 명의 목숨을 한 번에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제 더는 개인의 권리와 신념, 안전,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 싸우지 않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바로 이런 면에서 인류에게 불안감을 가중시켜왔습니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급격한 발전에 우리 인간은 신체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능력이 점점 약해진 반면 방어적인 심리는 점점 강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하였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차와 그 속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편으로 생각합니다. ‘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방어적인 심리를 통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항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응급실의 차가운 바닥이 아니라 내 삶의 터전이고 익숙하고 안락한 집에서 태어날 때 만남이 그러하듯 떠나는 이별도 나눌 수 있는 죽음이 행복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병과 죽음조차도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시점에서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시간이 중요하듯 죽음의 순간과 그 이후의 시간도 중요합니다. 죽음의 순간은 망자와 남아 있는 가족 더 크게는 이 사회에 많은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살아 있는 시간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월간암(癌) 200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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