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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치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6월 25일 12:58분878,599 읽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내 자신이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페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빈드라나스 타고르 <열매줍기> 중

사람은 누구나 깊은 내면에 하나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어떤 존재인데 우리가 그 존재에 가까이 다가갈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정한 나’에서 멀어져 갈 때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배움을 얻으려 하고 그 해답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 종교, 신, 또는 그런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 장소 등에서 해답을 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돈과 지위, 직업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심지어는 그것들이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로부터 암 판정을 받거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종착점에 서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합니다. 불행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어느 순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근본적인 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움이 즐겁지는 않지만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을 더 의미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을 얻기 위해 꼭 삶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요? 지금 이 순간 그 배움을 얻을 수는 없을까요?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보면 삶이라는 것은 이런 배움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입니다. 삶이라는 여행에서 우리가 맞붙어 싸워야 할 것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삶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수업과 같습니다. 그 수업에서 우리는 사랑, 행복, 관계와 관련된 단순한 진리들을 배웁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대부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을 잘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은 외롭고,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떤 것들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그 ‘나’는 결점이 있고, 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재산이 많을 수도 있고, 은행 잔고가 바닥나 있을 수도 있으며, 이력서, 배경, 성적, 실수, 육체, 역할, 직함, 이런 것들로 착각을 할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에 언제나 별이 있듯이, 나 또한 저 하늘의 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내 속에는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불변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왔고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변함없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나’에 충실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든지 ‘나’에게 충실합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다시 어린아이처럼 그러한 ‘나’에게 충실해집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이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안에는 원래 존재하던 것이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에 위대함의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단지 가장 뛰어난 자신을 드러내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제거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주변상황에 맞게 정의하는 습관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날씨가 좋고, 내가 사는 집의 집값도 오르고,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오고, 맛있는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느끼는 느낌은 큰 행복감을 줍니다. 반면에 상황이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많은 사건과 함께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맘먹은 대로 되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들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역할과 상황들 밑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숨어 있습니다. 거짓된 모습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알려는 노력의 첫걸음을 시작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시도의 첫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 판단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 등입니다.

그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목표이며, 하루의 매 순간마다 크거나 작은 방법으로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착해 보이는 사람에게 마음이 이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인위적이고 멋진 모습들로 진정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자체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레

월간암(癌)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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