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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마디] 웰빙을 위한 웰다잉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6월 19일 14:34분878,409 읽음

우리는 죽음을 잘 모른다. 교육받지도 않았고 죽음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죽음에 부딪히면 원초적 본능이나 관습적 대응에 따라 처리했다. 인간의 존엄은 지켜지기 어려웠고 가족이 붕괴되거나 해체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죽음 교육을 실시하자거나 호스피스 완화의료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기하면 여론은 이를 계속 무시해버리거나 사실을 왜곡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문제의 심각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힘이 버거운 판에 죽음의 질을 따지자는 것은 행복에 겨운 일이라고 깎아내리는 정부 관리의 무식과 독선이 정책의 진로를 가로막아왔다. 그들이 직접 환자복을 입고 암 투병을 하면서 격렬한 통증에 시달리는 체험을 하지 않는 한 문제를 풀어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들이 치매환자 곁에서 하루를 보내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웰빙과 웰다잉에도 똑같이 품위와 품격이 있다. 그것은 삶의 보람이요, 의미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2007년에 우리나라의 포도주 수입액은 한해 전보다 무려 60퍼센트나 늘었다. 웰빙의 상징적인 지표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한켠에서는 말기 암 상태에서 인간성을 상실했거나 고통 속에서 죽어간 사람이 늘어났다. 암 이외의 불치병 환자도 증가했다. 손 댈 방도가 없는 치매환자의 급증은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들 마음속의 웰다잉 지표는 이렇게 어둡다.

서울대의대 교수가 워크숍에서 토로한 이야기가 아직도 내 귀를 맴돌고 있다.

“내가 잘 아는 형제 의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입원시켜버리더군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환자가 고통스럽지 않게 호스피스 치료를 해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효도 경쟁이 빚어낸 아이러니였다. 주요 병원의 수술실 앞 대기실이나 휴게실에서는 환자의 집중 치료를 둘러싼 가족 간 다툼을 자주 볼 수 있다. 환자가 부모인 경우 치료가 의미 없는 단계에서도 중환자실 입원을 계속 요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의견 조정 때문이다. 이런 논의에서는 마지막까지 환자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주장이 항상 우세하다. ‘효도’라는 이데올로리가 우리의 관습을 지배하고 있어서다.

만약 이런 자리에서 ‘환자의 말기치료가 회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의사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가망 없는 중환자실 치료로 환자가 고통을 겪는 것보다는 통증치료를 받으며 인생을 정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면 그는 가족 내에서의 입장이 매우 어려워지기 십상이다. 환자의 인격이나 품위에 대한 배려는 ‘최후까지 중환자실 치료를 해주는 것이 효도’라는 가치관에 밀려난다.

보바스 병원의 박진노 완화의학센터 장은 우리들의 잠재의식 가운데 ‘위장된 효도’라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어 말기환자들의 여생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안타까워한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가족이 도착할 때까지 그의 임종 시간을 늦춰달라고 무리하게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자의 아픔이나 인권, 존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 요청을 받아들이려면 환자에게 혈압상승제를 복용시키는 등 몇 단계 처치가 필요합니다. 그때의 죄책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가족주의 성격이 강하다. 합리성과 자율성이 지배하고 개체성이 강조되는 서구 사회와는 달리 우리는 죽음을 가족의 틀 안에서 처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존엄사를 요구한 죽어가는 자의 뜻이 존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서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개념에 관심을 보이는 젊은 세대들이 이런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말기환자나 치매환자 등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우리들이 ‘불효’와 ‘효도’의 경계선에서 방황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하나이다. 언뜻 ‘품위 있는 죽음’을 머리에 떠올리다가도 따지고 보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원점에서 헤맨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웰다잉’이라는 문제가 결국 ‘웰빙’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품위 있는 죽음’에 무감각한 것처럼 행동한다.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최철주, 궁리

월간암(癌)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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