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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잠글 수 있다면야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3월 13일 11:07분877,980 읽음

서지숙|서울출생, 총회신학졸업, 전도사, 서라벌문예추천 등단(시 부분)

남산을 올랐습니다. 지금은 불타 버리고 없는, 황당하게 스러져 가버린 숭례문이 붙박이처럼 늘 거기 있을 줄만 알았었던 것처럼, 서울의 동서남북 어디서고 눈 들어 올려다보면 정물인 냥 늘 그렇게 거기 우뚝 하늘 쳐 받치는 남산타워가 있는 곳. 남산을 올랐습니다.

가는 길이 쉽기도 하더군요.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노란색 남산순환버스를 타니 구불구불 남산 외곽의 차도를 돌아 10여 분도 채 안 되어 금세 전망대 아래 우리를 부려 놓았습니다.
“소나무가 참 많기도 하네! 남산에 소나무가 이렇게 많았었나?” 새삼스레 발견한 사실에 짐짓 놀라며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의 가사를 떠올려도 보았습니다.

언제런가, 가만있자. 딸애가 지금 만으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넘었으니 남산을 이렇게 찾은 지가 이십 년이 훨씬 넘었네요. 그려, 결혼하기 전 화려한 데이트도 변변히 갖지 못하던 시절, 남산을 찾아 계단을 올랐었지. 어디서 봤는지 손에 아카시아 잎을 그러지고 나풀거리며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진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내기를 하며 하하 호호 웃었던 추억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더이다.

남산타워 아래서의 저녁은 초여름도 가을 같더이다. 공중에 띄워놓은 설치작품은 마치도 부유하는 투명인간처럼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누리는 듯 보였습니다. 고단한 삶에 쫓기고, 욕심에 눌리고, 분요한 일상에 치여 낭만과 여유를 저당잡힌 채 참 재미없게도 살았네요. 우리.
뜻밖의 암초, 암이라는 고약한 친구에게 발목 잡혀 언뜻 뒤돌아보니 그렇게 그렇게 그 세월을 멋없이 가엾게 지나왔네요. (당신, 아시나요. 이말? 가엾게 지나왔다는 이 말!)
하여 기회가 주어지면 힘내어 미루지 않고 꼭꼭 챙기려 합니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지 않고 맛난 거 먹을 일 있으면 먹고, 좋은 거 볼 일 있으면 또 보러 가고 그렇게 오늘을 힘을 다해 참여하며 내 삶의 진짜 주인으로 살려고 무진 애를 쓰며 차박차박 갑니다.

초여름저녁, 가을 바람이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속삭입니다. 시와 음악과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가 흐르는 황송한 자리에 이 저녁 나는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 고즈넉한 멋이 여인의 살풋한 향수처럼 매혹적인 이곳에 와있습니다.
절인 내 나는 속세와는 문풍지 한 장 차이 나는 듯 한데 이곳, 지금 이 마음은 하냥 낙원인 것만 같습니다.

남산타워 아래 전망대의 철망에는 참 기이한 것들이 주렁주렁 셀 수 없이 많이 달렸습디다. 자/물/쇠! 웬? 자. 물. 쇠?
하하하! 알고 난즉슨 연인들이 남산에 올라와 자신들의 사랑이 영원히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철망에 자물쇠를 잠그고는 그 열쇠를 전망대 아래로 알지 못할 곳, 찾지 못할 곳으로 휙~ 던져 버린답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입만 한 놈부터 코끼리 발만 한 놈까지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이더이다.

당신, 음~ 사랑을 잠글 수 있던가요? 자물쇠로 잠가서 잠가지는 사랑이라면 어디 누구라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겠는지요!
변하는 사랑에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도장을 찍고 각서를 쓰듯 자물쇠를 거는 이 의례를 목격하니 시나브로 가슴 한쪽이 싸아하니 허망해지더이다.
남산 전망대 철망에 기대어 아스라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지금은 가고 없는 노시인의 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금아 피천득님의 시 <이순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과 밤하늘의 별을 함께 올려다보는 이 순간.
잠든 아이의 착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이마를 쓸어 올리는 그 순간.
삶의 한 점 한 점을 쌓아가는 이 순간이 생각해 보면 우주도 감당 못할만큼 화려한 사실이라는 거, 삶의 죽을 고비를 지나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투병생활로 몸도 맘도 괴로워질 때, 이제는 그냥 그만 애쓰고 싶어질 때, 당신은 무엇으로 다시 기운을 추스르고 다시 또 마음을 다잡으시나요?
내가 싫다고 밀어내는 내 삶의 이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지요? 내게만 주어지는 금자리라지요! 허허.
사랑을 잠글 수 있다면야, 생명을 자물쇠로 꼬옥 잠글 수 있다면야, 그래서 사랑도 생명도 움직이지 않고 스러지지 않고 매양 그렇게 한 길로 흐를 수 있다면. 그럴 수 없는 삶이기에 남산을 오르는 행복한 연인들은 안타까운 소원을 담아 오늘도 자물쇠를 걸겠지요.

당신, 우리도 언제 하루 날 잡아 남산전망대 철망에 희망을 잠그러 가야겠지요. 튼실한 자물쇠 하나 철망에 걸고 꼭꼭 손잡아 맹세할까요!
회복하기, 우울해하지 않기, 약 잘 먹기, 운동하기, 많이 웃기, 잠잘 자기, 자물쇠 잠그고 잘 지킬 수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면.

월간암(癌)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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