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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돌을 맞아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3월 11일 10:51분878,654 읽음

해찬들|45세. 직장암 3년째.

아침 일찍 눈을 뜨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방을 나왔다. 그런데 거실이 난리다. 화장실의 휴지통이 넘어져 있고 화장지가 거실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길게 풀어헤쳐 38선을 만들어 거실을 두 동강 나눠놨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야! 쪼꼬(비상식량), 이리 와봐.”
‘너, 오늘 제삿날이다. 얼른 물 끊여야지.’하고 속으로 구시렁대며 강아지를 찾는데 이 녀석이 소파에 떡 버티고 눈만 말똥말똥 치켜뜬 채 쳐다보고 있다.
“야! 이 똥개야.” 소리를 꽥 질렀다. 깜짝 놀란 쪼꼬가 뭔 일인가 싶은 얼굴로 커다란 눈동자만 끔뻑거린다. 거실에 널려 있는 화장지를 들고 “너 오늘 진짜 혼난다.”했더니, ‘아! 뭔 말인지 알겠다.’라는 표정으로 발라당 몸을 뒤집더니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올려다본다.
“쪼꼬, 진즉에 된장 발랐어야 하는데…. 너 오늘 제삿날이다. 알지?” 일장 훈계를 하고 둘레를 보니 바닥에 딸아이 공책이 보인다. 얼른 집어 머리를 두어 대 때렸다. 그랬더니 깨갱거리며 죽는다고 엄살을 피운다.
“화장실 들어가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엉? 이 똥개가 내 말이 말 같이 안 들려?”하면서 때리는 시늉을 했더니 눈을 끔뻑이면서 고개를 돌린다. 성질 같아선 더 혼내고 싶었지만, 딸아이가 보면 “죄 없는 강아지를 왜 때려!”하면서 징징댈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너, 오늘 내 생일이라 봐 준 거야.”하고 돌아서는데, 비상식량이 궁둥이를 씰룩쌜룩 거리며 걷는 것이 ‘오늘 재수 없게 성질 더러운 아빠한테 걸렸네.’하고 투덜대는 모양이다. 얄밉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쌍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벨도 없는지 꼬리를 흔들고 난리다.

우리 집 쪼꼬는 툭하면 좋아서 드러눕고 헬렐레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계집아이가 툭하면 드러눕느냐고 타박을 해도 남이야 내버려둬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집에서 한결같이 반겨주는 녀석이 쪼꼬이다.
오늘 ‘물 끓인다.’라는 말은 취소다. 알았지?
아마도 우리 쪼꼬가 일기를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쪼꼬의 일기>
우리 주인은 성질이 더럽다. 만날 소리를 지르고, 툭하면 걷어차기도 한다. 밥 많이 먹으면 똥 많이 싼다고 밥도 적게 주기도 한다. 그래 봐야 엄마랑 언니는 내 편이다. 앞집의 메리는 조용할 때 들어보면 가끔 껌 씹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난 껌을 언제 씹어봤는지 모른다. 주인이 밥값도 아깝다고 난리인데 껌까지 사주리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훨씬 많이 먹고 화장실도 많이 가면서 나보고 아무 데나 똥을 싼다고 난리를 친다.
내가 화장실에서 똥 싸고 물 내리면 사람이지 강아지냐? 아무튼, 더러운 놈이다. 요즘은 주인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그래야 내가 편하다.
어제는 성질이 나서 주인이 오거나 말거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누워서 꼬리는 예의상 흔들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오는데 일어나지도 않는다면서 발로 툭 친다. 언제는 짖는다고 난리더니 안 짖으면 안 짖는다고 짜증을 내니….
생각할수록 열 받아서 밤에 아무도 모르게 화장실 발 닦는 수건에 똥을 싸버렸다. 그랬더니 아침에 어떻게 알았는지 일어나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된장 발라 버린다고 협박을 한다. 만날 그러니 ‘지가 그러다 말겠지’하고 내버려뒀다.
밥도 늦게 먹은데다 욕까지 먹으니 갑자기 속이 안 좋다. 좀 누워 있으면 좋아지려니 했는데 화장실 갈 틈도 없이 거실에 있는 이불에 토해버렸다.
그걸 본 주인은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고 헐크로 변한다 싶어, 냅다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우리 주인이 빗자루를 들고 온갖 협박을 다했지만 ‘내버려뒀다가 지치면 나가야지….’ 하면서 버텼다. 어휴, 주인을 잘 만나야지. 쪼꼬 일기 끝.

오늘은 암환자가 되고 두 번째 맞는 생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에 걸쳐 수술했고, 6개월 동안 장루를 해서 고생도 참 많이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 차례에 걸쳐 응급실에 실려 가고, 다섯 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내과, 외과, 방사선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뇌신경과 이렇게 두루두루 오지랖 넓게 6군데를 다녔으니 그 고생이야 어디 말로 다할까. 며칠 전, 뇌신경과와 이비인후과를 예약했다. 아마도 며칠 후면 비뇨기과도 다녀와야 할 참이다.
어찌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던지…. 남들은 물론 아내한테도 말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기 일쑤였고 딱 그만 놔버리고 싶을 때가 숨 쉬는 횟수만큼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그때에 견주면 지금 내 몸은 완치된 거나 다름이 없다. 물론 지금도 조금 힘은 들지만…….

가끔 내가 나쁜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의사가 분명히 오진을 했을 거야.’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한다.
이제 먼 앞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재미있고 즐겁게 ‘오늘’을 살고프다. 오늘 하루만 신나게 말이다.

월간암(癌) 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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