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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 부르기도 전에 먼저 가버린 벗에게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1월 15일 10:28분878,349 읽음

떠나간 김영숙님을 추모하며

얼마 전 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나이도 같고 시를 쓰고 노래를 좋아하는 취향도 비슷하고, 더욱이 같은 유씨(유방암환자의 통칭. 폐암은 폐씨로, 위암은 위씨로) 처지라 한결 친근한 감이 들어 지난 연말 환우모임에서 반갑다고, 우리 만나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자고, 손을 맞잡고 흔들던 일이 새삼스러운데 간다는 말도 없이 먼저 훌쩍 손 놓고 가버리셨네요.
어떻게 그리 갈 수 있었나요? 발을 잡아끄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 텐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삶의 이런저런 끈들을 어찌 떼고 갈 수 있었나요? 단단한 돌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들의 얼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이유 있는 서러움에, 안타까움에 못내 눈물겨워집니다.
어여쁜 얼굴, 잔잔한 음성에 풍류를 즐기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아픔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감성을 서로 알아볼 수 있었기에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겠다 싶어 환우모임을 기다리고, 소통할 길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다시 그 음성을, 그 웃음소리를 들을 길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한쪽 유방 전절제를 앞두고 괴로워하며 불면의 밤을 샌다는 또 한분을 음성으로만 만나고 있습니다. 전화기 저편의 그녀는 너무도 여리기만 합니다. 우리처럼 ‘아픔을 관찰’하거나 ‘암을 노래’하는 성찰과 사유에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렴요. 그대처럼 ‘아픔을 관찰’하거나 나처럼 ‘암을 노래’하는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녹록치 않았습니까!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이야기에는 암수술을 앞두고 자신의 가슴 한쪽이 없어져 나간다는 잔인함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학과 살 가치도 없다고 단정해버리고, 일상과 하물며 자식들에 대한 애착까지도 접어버리려는 절망이 더 큰 병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렇지요? 암! 살아야지요. 살아서 자식들 장성하는 모습도 보고 이렇게나 아름다운 산하의 들이며 산이며 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며 말소리, 그 소중한 것들을 끝까지 다 누리고 겪으며 암팡지게 살아야지요. 그렇고 말고요.
들어주는 것도 약이라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들어주지만 가장 저를 기막히고 힘 빠지게 하는 말은 “귀찮아요. 그냥 이대로 다섯 식구 다 가버리자고 하고 싶어요, 살기 싫어요. 허망해요. 살아서 뭐해요. 살아봤자 별 거 있겠어요.” 이런 말들입니다.
그래요. 그녀 말대로 인생 별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장 가슴을 들어내야만 하는 기막힌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속없는 남편이며 아이들은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그녀를 귀찮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허망함이나 좌절을 이해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허투루 내리깔아버리려는 그 가벼움에 안타까운 나머지 속이 상하더군요.

그대여, 그대도 마지막 생의 작별을 고하기 전 그러셨든가요. 가족이 귀찮고, 삶이 허망하고 인생이 별거 아니던가요? 그렇지 않았으리라 믿어요. 아픔을 찬찬히 관찰하고 들여다봤던 그대는 삶의 분초도 치를 다해 붙잡고 똑똑히 두 눈 뜨고 정면으로 바라봤으리라 믿어요. 아! 그대 가는 길에 내가 배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벗이여, 그리하여 지금은 세상사는 수고를 내려놓고 잘 쉬고 있겠지요.

이다음 육체의 허물을 벗고 우리 삶을 이끌어 오신 절대자 앞에 선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분이 있어요. “얘야, 사니라고 애썼제!”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모두들 눈가가 붉어지던 기억이 있어요. 우리 모두 너나없이 얼마나 사니라고 애면글면 애쓰며 가고 있나요.
그대여! 그대도 사니라고 애썼지요? 힘들었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감히 뒤에 남겨진 저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렵니다.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고통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인생의 신비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하루도 사고와 슬픔과 고통이 끊이지 않고 줄을 이어 돌아갑니다. 또 한편 세상은 행복하고 결혼식을 하고 아이를 낳고 웃고 떠들며 시끌벅적하게 돌아갑니다.
사는 것이 그런 거라면 생의 어떤 한 순간, 한 부분도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살며 사랑하며 느끼며 누리며 나누는 일에 힘을 다해 마음을 다해 살아볼 일이라 다시금 다짐을 꼭꼭 해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지도 않을 일이며 호들갑스럽지도 않을 일입니다.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아프면 아파하고 즐거우면 웃고 억지로 참지 않고 힘써서 감추지 않으며 그렇게 순하게 살려고 합니다.

아 잠시 후면 온 천지에 봄이 가득하겠지요. 부드러운 햇살은 대지를 품고 겨우내 닫혀있던 생명들을 밖으로 불러낼 것입니다. 그대여, 그대가 누리고 가지 못한 이 봄의 향연을 저는 여기 남아서 마음껏 호흡하렵니다. 그대가 미처 갖지 못하고 떠난 그 몫까지 모두 말입니다. 팔을 활짝 펴서 한껏 이 가슴에 품으렵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눈 감으면 그대의 응원이 들리는 듯합니다. 잘 사세요. 마지막 한 날까지 힘을 다해 열심히 잘 사세요. 물러서지 말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해 가세요. 희망은 붙잡는 자의 것이에요. 슬퍼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비관하지 말고 가세요. 삶은 살아야만 할 충분한 가치가 있어요. 삶이 아름답다면 죽음도 아름다워요. 건강도 귀하지만 아픔도 이유가 있어요. 나를 아프게 해야 할 그 뜻을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다시 삶의 끈을 질끈 동여 메고 달려가세요. 감동 없이 바라보던 일상의 풍경들이 달리 보일 거에요. 이제 더 이상 아픔은 아픔만이 아닙니다.

그대여. 그렇습니다.
한낮이 끝나야 밤이 오고 겨울이 가야 봄이 오듯 이 고통의 강을 건너 소망의 기쁜 숲으로 인도되어 갈 것임을 나는 이제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노동의 땀으로 결실한 밥 한 공기를 먹는 일, 아무렇게나 던져진 양말을 반듯하게 개어 그 양말을 신고 다닌 세상 구석구석의 사람살이를 떠올리고, 살붙이들의 편안함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여! 그대 옆에 작은 곁 하나 남겨 두시렵니까?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들, 그대가 미처 마치지 못한 시편들을 내가 마무리하여 함께 읊을 수 있도록 빈자리 하나 오늘 미리 예약해 두렵니다.

월간암(癌)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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