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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세포의 배신, 악성 뇌종양 키우는 은밀한 통신망 차단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6년 06월 30일 12:37분73 읽음
정상 뇌세포의 조력 메커니즘 규명 및 기존 에이즈(HIV) 치료제의 항암 효과 확인
뇌종양 중에서도 가장 독하고 전이가 빨라 현대 의학 분야에서 최악 난제로 꼽히는 ‘교모세포종(Glioblastoma)’. 진단 후 평균 생존 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치명적인 이 뇌암은 왜 그토록 치료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과거 과학자들은 이 암세포 자체가 워낙 맹렬하고 강력해서 통제하기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McMaster University)와 토론토 아동병원(SickKids)의 공동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뉴런(Neuron)>에 발표한 연구는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다. 암세포가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뇌를 보호해야 할 든든한 ‘정상 뇌세포’들을 세뇌시켜 자신의 조력자로 부리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연구팀이 이들 사이의 은밀한 통신망을 끊어버릴 수 있는 약물을 새롭게 개발할 필요 없이 '이미 시판 중인 약'에서 찾아냈다는 점이다.

뇌를 지키는 보호막의 안타까운 배신
우리의 뇌 속에는 신경 세포들이 정보를 무사히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전선의 피복(절연 테이프)처럼 신경 줄기를 부드럽게 감싸 보호해 주는 착한 세포들이 있다. 바로 ‘희소돌기아교세포(Oligodendrocytes)’다. 그런데 연구팀이 교모세포종 주변의 세포 환경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이 착한 보호막 세포들이 암세포 주변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암세포가 뿜어내는 특정한 화학 신호에 세뇌당한 이 세포들이, 본연의 신경 보호 임무를 내팽개치고 오히려 암세포가 더 잘 자라고 주변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고 생존을 돕는 '조력자(스파이)'로 돌변해 버린 것이다.

암세포는 단순한 덩어리가 아닌 거대한 ‘생태계’
연구를 이끈 맥마스터 대학교의 쉴라 싱(Sheila Singh) 교수는 “교모세포종은 단순히 멍청한 암세포들의 덩어리가 아니라, 주변의 정상 세포들과 촘촘하게 소통하며 살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Ecosystem)’”라고 설명한다.

암세포와 세뇌당한 뇌세포들은 마치 무전기를 주고받듯 특정한 신호 물질을 통해 쉴 새 없이 대화(통신)를 나눈다. 연구팀은 실험실 모델을 통해 이 둘 사이의 통신망을 강제로 차단해 보았다. 그러자 조력자의 지원을 받지 못한 교모세포종의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뚝 떨어지는 현상을 확인했다. 암세포의 숨통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취약성)을 찾아낸 것이다.

뜻밖의 돌파구, 기존 ‘에이즈(HIV) 치료제’의 재발견
그렇다면 이 악성 통신망의 무전을 끊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해답은 완전히 다른 질병인 에이즈(HIV) 치료제에 숨어 있었다. 암세포와 세뇌당한 뇌세포가 소통할 때 사용하는 핵심 안테나(수용체) 중 하나가 바로 ‘CCR5’이다. 그런데 현재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들의 바이러스 증식을 막기 위해 처방하고 있는 ‘마라비록(Maraviroc)’이라는 약이, 바로 이 CCR5 안테나의 작동을 정확하게 차단하는 약물이었던 것이다. 연구진의 실험 결과, 이 마라비록 약물을 투여하자 뇌세포와 암세포 사이의 통신이 먹통이 되었고 종양의 성장이 강력하게 억제되었다.

‘신약 재창출’이 환자에게 선물하는 생명의 시간
이 발견이 교모세포종 환우들에게 가슴 뛰는 희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시간 때문이다.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항암제를 개발해 동물 실험과 독성 검사를 거쳐 환자에게 투여하기까지는 보통 10년 이상의 엄청난 시간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하지만 마라비록과 같이 이미 다른 질병의 치료제로 식약처의 승인을 받아 널리 쓰이고 있는 약을 암 치료에 다시 적용하는 ‘신약 재창출(Drug Repurposing)’ 방식을 사용하면, 지루한 안전성 검증 단계를 대폭 건너뛰고 훨씬 빠르게 실제 환자 대상의 임상시험에 돌입할 수 있다. 치료제가 절실한 뇌종양 환자들에게는 단 1~2년의 시간 단축도 생명과 직결되는 엄청난 기회다.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지능적인 치료의 시대
토론토 아동병원의 제이슨 모팻(Jason Moffat) 박사는 “우리는 암의 생태계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파괴할 수 있는 이미 상용화된 훌륭한 치료 표적을 찾아냈다”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적의 끈끈한 동맹과 생태계를 이해하고, 통신망을 차단하여 적을 완전히 고립시켜 버리는 영리한 항암 전략. 신약 개발의 오랜 기다림 없이 기존 약물을 활용해 최악의 뇌종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경로가 열렸다는 사실은, 남은 치료 옵션이 부족해 절망하던 교모세포종 환우들에게 또 다른 기적이 시작될 수 있음을 매우 희망적으로 보여준다.

[편집실에서] 쏙쏙 이해되는 최신 뇌과학 종양 사전
교모세포종 (Glioblastoma): 뇌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 중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독하고 공격적인 암입니다. 성장 속도가 매우 빨라 뇌의 다른 부위로 스며들듯 전이되기 때문에 수술로 완벽하게 떼어내기가 어렵습니다.

희소돌기아교세포 (Oligodendrocytes): 정상적인 뇌 속에서 신경 세포의 신경 섬유를 둥글게 감싸 안아, 전기 신호가 새어나가지 않게 보호막(미엘린 수초)을 형성해 주는 아주 고마운 정상 세포입니다.

신약 재창출 (Drug Repurposing): 이미 특정 질병(예: 에이즈, 구충제 등)의 치료제로 허가를 받아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 완전히 다른 질병(예: 암)에도 효과가 있음을 찾아내어 새로운 치료제로 탈바꿈시키는 효율적인 신약 개발 방식입니다.

참조:
Nicholas Mikolajewicz, Kui Zhai, Anish Puri, Petar Miletic, Nazanin Tatari, Jiarun Wei, Neil Savage, Zhi Huang, Qian Huang, Seon Yong Lee, Mahta Jan-Ahmadnejad, Roseanne Nguyen, David Chen, Tiegan Korman, Daniel Mobilio, Maxwell Topley, Jack Qinyu Lu, Matthew R. Voisin, Zsolt Zador, Shawn C. Chafe, Chitra Venugopal, Kevin R. Brown, Gelareh Zadeh, Hong Han, Julien Muffat, Shideng Bao, Sheila K. Singh, Jason Moffat. Reactive oligodendrocytes promote glioblastoma progression through CCL5/CCR5-mediated glioma stem cell maintenance. Neuron, 2026; 114 (2): 237 DOI: 10.1016/j.neuron.2025.12.012
월간암(癌) 202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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