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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현대의학혈액 한 방울로 암의 숨은 흔적을 쫓다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6년 03월 31일 16:56분87 읽음
- 신비로운 '고아 RNA(oncRNA)'가 열어가는 암 진단과 치료의 새로운 지평
우리 몸의 설계도가 DNA라면, 그 설계도의 복사본을 들고 다니며 실제 일꾼(단백질)들을 만들어내는 전달자는 'RNA'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데 관여하는 RNA에만 집중해 왔다. 그런데 2018년, 유방암 조직에서 정상 세포에는 없는 아주 독특하고 미스터리한 RNA 조각(T3p)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단백질을 만들지도 않고 홀로 떠도는 이른바 '고아 비번역 RNA(orphan non-coding RNA, 이하 oncRNA)'였다. 이 작은 발견은 6년에 걸친 방대한 추적 연구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과학자들은 이 신비로운 RNA들이 암의 종류를 정확히 구별해 내는 '바코드'이자, 혈액 검사만으로 몸속에 숨어있는 잔존 암세포를 찾아내는 완벽한 '추적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암세포마다 새겨진 고유한 디지털 바코드
연구진은 이 현상이 유방암에만 국한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32가지의 주요 암 데이터를 샅샅이 뒤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모든 종류의 암에서 정상 세포에는 없는 약 26만 개의 암 특특이적 'oncRNA'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RNA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암의 종류마다 뚜렷하고 고유한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의 oncRNA 패턴과 유방암 환자의 패턴은 확연히 달랐다. 심지어 같은 유방암이라도 성질(아형)에 따라 모양새가 구분되었다.
연구진이 인공지능(기계 학습)에 이 패턴을 학습시키자, AI는 RNA의 형태만 보고도 무려 90.9%의 높은 정확도로 암의 종류를 척척 분류해 냈다. 몸속에 생겨난 이 작은 RNA 조각들이 암의 정체와 상태를 낱낱이 기록해 두는 일종의 '디지털 분자 바코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흔적이 아닌, 암을 키우는 '숨은 엔진'
과학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oncRNA들이 그저 암세포가 만들어낸 찌꺼기 같은 흔적일 뿐인지, 아니면 암을 더 사납게 만드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약 400개의 oncRNA를 쥐의 몸속에 있는 암세포에 주입해 보는 대규모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약 5%의 oncRNA가 실제로 암의 성장을 눈에 띄게 촉진하는 '엔진' 역할을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유방암에서 발견된 두 가지 oncRNA는 세포가 끝없이 증식하도록 스위치를 켜거나,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퍼져나가기 쉽도록 형태를 변형시키는(상피-중엽 전이)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암세포가 이 신비로운 RNA들을 무기 삼아 자신의 세력을 뻐젓이 확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혈액 1mL의 기적: 피 속으로 적극적으로 분비되는 RNA
이번 연구에서 임상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그리고 환우들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대목은 바로 '혈액'와 관련된 발견이다. 암세포는 이 중요한 oncRNA 중 약 30%를 세포 밖으로, 즉 환자의 혈류(핏속)로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는 기존의 암 추적 방식과 비교할 때 엄청난 강점을 지닌다. 현재 널리 연구되고 있는 '세포유리 DNA(cfDNA)' 검사는 암세포가 죽으면서 수동적으로 흘린 DNA 찌꺼기를 피 속에서 찾는 방식이다. 마치 가을에 나무에서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사귀를 찾는 것과 같아서, 초기 암이거나 암세포 크기가 작을 때는 핏속에서 발견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하지만 RNA는 암세포가 살아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피 속으로 뿜어내는 '메시지'와 같다. 연구진은 I-SPY 2라는 유방암 항암 치료 임상시험에 참여한 192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치료 전후에 채취한 단 1mL의 혈청(피)만으로 이 oncRNA의 양을 측정해 보았다.
결과는 놀랍도록 명확했다. 항암 치료 후에도 핏속에 이 RNA가 높게 남아있는 환자들은 그렇지 않은 환자들에 비해 생존율이 눈에 띄게 낮았다. 1mL라는 극히 적은 양의 피만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잔존 암세포가 몸속에 남아 숨을 죽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환자들의 헌신이 만들어낸 희망의 이정표
물론 아직 풀어야 할 숙제들은 남아있다. 이 RNA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단백질과 결합하여 암을 돕는지, 실시간으로 이 수치를 추적하는 것이 치료약의 방향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더 큰 규모의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현재 연구진은 바이오 기업과 손을 잡고 이 RNA 기반의 진단 기술을 인공지능과 결합하여 실제 병원에서 쓰일 수 있도록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구진은 논문의 말미에 이런 감동적인 인사를 남겼다.
"컴퓨터 화면 속 수만 개의 데이터를 분석하다 보면, 이 데이터 하나하나가 연구를 위해 기꺼이 피를 뽑고 자신의 정보가 다른 이들을 살리는 데 쓰이길 바랐던 '환자분들의 간절한 헌신'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 숭고한 기여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엄격하고 신중하게 과학적 진실을 쫓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환자의 용기와 과학자들의 집념이 모여, 암이라는 질병을 이해하고 추적하는 새로운 시대를 희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환우분들이 힘든 조직 검사 대신, 가벼운 채혈 한 번만으로도 몸의 상태를 안심하고 확인할 수 있는 따뜻한 의료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실에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의학 용어 사전
고아 비번역 RNA (oncRNA): 유전 정보의 전달자인 일반적인 RNA와 달리, 단백질을 만들지 않고(비번역) 그 기능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고아(orphan)'처럼 여겨졌던 특수한 RNA 조각입니다. 이번 연구로 암의 성장을 돕는 핵심 물질임이 밝혀졌습니다.
미세 잔존 질환 (MRD, Minimal Residual Disease): 수술이나 항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미세하게 몸속에 남아있는 암세포를 말합니다. 이 MRD를 빨리 발견할수록 재발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상피-중엽 전이 (EMT): 얌전히 뭉쳐 있던 암세포가 모양을 뾰족하게 바꾸고 이동성을 얻어, 주변의 혈관을 뚫고 다른 장기로 전이(이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생물학적 과정을 뜻합니다.
참조:
Jeffrey Wang, Jung Min Suh, Brian J. Woo, Albertas Navickas, Kristle Garcia, Keyi Yin, Lisa Fish, Taylor Cavazos, Benjamin Hänisch, Daniel Markett, Gillian L. Hirst, Lamorna Brown-Swigart, Laura J. Esserman, Laura J. van ‘t Veer, Hani Goodarzi. Systematic annotation of orphan RNAs reveals blood-accessible molecular barcodes of cancer identity and cancer-emergent oncogenic drivers. Cell Reports Medicine, 2026; 102577 DOI: 10.1016/j.xcrm.2025.102577월간암(癌) 202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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