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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도에서 쓰는 동백예찬(冬柏禮讚)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4년 02월 02일 17:59분1,465 읽음
글: 김철우 (수필가)

눈이 내리고 있다. 3월 그것도 중순에 내리는 폭설. 덕유산 부근을 지날 무렵부터는 차창에 부딪치는 눈 때문에 운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행이도 춥지 않은 날씨 탓에 눈은 도로에 쌓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차 밖 풍경은 순식간에 한 편의 그림 같은 설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라디오를 켜고 CD를 밀어 넣었다. 재즈풍으로 편곡한 영화 <쉘브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 의 테마곡. 중학교 땐가 이 영화를 보고 까뜨린느 드뇌브의 청순함과 색감이 뛰어난 여러 장면들, 사랑에 가슴아파하는 ‘쥬느비에브’와 ‘기이’. 그리고 마지막 눈 내리는 주유소 장면 등에 반해 쉘브르에 꼭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는데 프랑스를 예닐곱 번이나 방문하는 동안 일정이 맞지 않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쉼 없이 왕복하는 와이퍼의 움직임과 창 밖 설경 그리고 피아노 선율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영을 지나며 길은 14번 국도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눈은 그치고 가는 빗줄기가 차를 따르고 있다. 지심도를 먼저 보려던 당초의 일정을 바꿔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동백꽃도 봉우리를 오므리기 때문에 내일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지만, 여행의 첫 목적지를 바꾸기는 왠지 싫었다. 신 거제대교를 지나며 유리창을 조금 열었다. 비가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성포, 고현, 옥포를 지나며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승포항의 한쪽, 유람선 선착장이나 여객선 터미널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컨테이너, 박스가 지심도행 매표소다. 두 시 반에 출항하는 표를 미리 끊어놓고 거제에 오면 꼭 먹어본다는 해물 뚝배기집을 찾았다. ‘항만식당’이란 간판이 걸린 2층 건물은 각 TV 방송에 소개되었다는 안내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뚝배기의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곳 사람들의 불평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뚝배기의 맛이 변한 건지 사람들의 입맛이 변한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선한 게와 홍합, 새우, 소라 등이 푸짐한 뚝배기는 도심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 맛은 아니었다.

매표소에 돌아와 한가하게 TV를 보는 직원에게 지심도(只心島)의 의미를 물었더니 ‘한자의 마음 심(心) 자를 닮아 지심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십여 분의 짧은 항해 끝에 도착한 지심도 선착장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며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역시 동백이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 지심도에는 어느덧 동백나무 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갈 지(之)자로 굽어진 길은 정상을 향하고 길가의 동백나무가 하늘을 덮어 만든 동백터널이 길 위에 펼쳐진다. 봉우리를 오므렸던 동백꽃이 햇살을 받아 한껏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백꽃은 나뭇가지에도, 시멘트 길 위에도, 민박집 평상 위에도, 지붕 위에도, 소나무 밑동에도 흐드러져 있다. 그 처연한 아름다움이여!


내가 '붉음'을 사랑하는 이유는 동백 때문이다. 붉지만 상스럽지 않고 고귀한 색을 지닌 것이 바로 동백이다. 시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장 절정의 순간에 세상을 향해 몸을 던지므로 동백은 구차하지 않다. 툭. 또 한 송이가 진다. 동백은 풍경(風磬) 같은 존재다. 그래서 동백꽃이 지는 것을 보면 왠지 경건해진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동백꽃이 지기 전 꽃잎의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꽃이 땅에 부딪히는 순간의 긴 여운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동백꽃은 나뭇가지에 붙어 있을 때보다 땅위에 떨어져 있을 때 더 아름답다. 온전한 꽃송이로 남아 있든, 누군가의 발길에 밟혀 있든, 물기에 젖어 시들어 있든 모두 아름답다.

동백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저 슬프고도 아름다운 낙화를 설명할 길이 없지 않겠는가.

뱃길로 십여 분을 달렸을 뿐인데 섬은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다. 등 뒤쪽에서 후드득 새가 날아오른다. 낯선 여행자의 방문이 익숙한지 경계하는 빛도 없다. 민박집 아주머니에게 물어서 알게 된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신비로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오르다 낡은 목조 건물 하나와 마주친다.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주위의 건물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둘러보다가 지심도를 소개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일제하의 일본군 식당 건물. 아직도 남아 있는 포진지, 무기고와 더불어 지심도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

길은 다시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백 숲을 지나 정상을 향한다. 흰색 국방과학연구소 건물 앞을 지나 넓은 잔디밭 정상에 서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창해(滄海).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잔디밭에 앉아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곳엔 고요만 흐른다. 새소리도 몽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심도에 오르니 알겠다. 지심도 동백꽃이 새소리를 들으며 피고, 바닷가 몽돌 소리를 들으며 진다는 것을. 지심도(只心島)는 우리 삶이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말해주는 섬이란 것을.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며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손을 내밀어 줄 것 같은 섬이란 것을.

장승포에 도착해서 다시 14번 도로를 달린다. 거제에서 묵을 곳으로 지세포(知世浦)를 선택한 것은 이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세포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포구가 아니었다. ‘여기가 지세포가 맞나요?’ 혹여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촌로에게 물었더니 ‘여기가 지세포’라는 대답.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는지 촌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긴 방파제와 하얀 등대 그리고 만선으로 돌아온 배위에서는 그물을 터는 노랫소리 흥겹고, 아낙네들은 삼삼오오 모여 굴을 까는 한가로운 시골 포구의 모습을 떠올렸던 내게 시멘트로 둘러쳐진 포구의 모습은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아직도 어리석은 여행자는 이곳에서 세상사는 법을 들으며 잠을 청하려다가 가로등에 앉아 있는 무심한 갈매기들만 바라보고 차를 돌렸다. ‘와현’이나 ‘구조라’에서 머무를까 고민했지만, 결국은 ‘학동’에서 묵기로 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민박집 창가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파도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도 소리와 몽돌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 까만 조약돌이 1.2 Km 나 펼쳐져 있는 이곳 학동 몽돌해수욕장은 파도에 의해 밀려오고 밀려가며 내는 자갈 구르는 소리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소리 100 선 중의 하나’라니 여행자에게 이보다 호사스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어젯밤 달이 뜨던 외도 부근에선 벌건 해가 솟아오르고, 해가 조금씩 모습을 보일수록 사방은 푸르게, 노랗게, 또 붉게 옷을 갈아입고 있다.

민박집 창문을 온통 열어젖히고 한참을 바라보다 해변으로 나갔다. 아직 휴가철도 아니고 평일이어서 그런지 그 넓은 해변에는 혼자뿐이다. 쏴아.....자르르르.....쏴아.....자르르르.....

소리란 본래 허망한 것이어서 허공에 퍼지는 순간 다시 찾기 힘들거늘 이곳의 몽돌 소리처럼 오랫동안 같은 소리를 내게 하는 자연의 힘 앞에 나는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차는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14번 도로를 달린다. 길가에 펼쳐진 동백 숲엔 바다를 향해 붉은 동백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길은 다대를 지나 1018번 지방도로 이어진다. 거제의 동백이 찬란한 것처럼 거제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려면 이 도로를 달려야 하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섬의 해안선을 따라 차를 달리는 일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 일일 테니까.

1018번 지방도를 달리며 만나는 첫 번째 해변이 바로 ‘여차’. 거제에 사는 많은 사람이 여차 해변을 첫손에 꼽는다고 해서 반신반의했는데 언덕 위에서 바라본 여차 해변은 탄성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여차에 이르러 기세가 꺾인 거제 최남단의 ‘망산’은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몽돌들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를 향한 작고 푸른 만(灣)은 마치 ‘비밀의 해변’ 같다. 무인도에나 있을 법한 때 묻지 않은 해변. 불쑥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튀어나온다. 여행자에게 아름다운 해변을 만나는 일만큼 가슴 설레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여차를 지나며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망산을 끼고 도는 홍포-여차 전망 도로. 대, 소병대도가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펼쳐지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어유도, 가왕도와 더불어 매물도와 소매물도가 멀리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받은 연애편지에 번진 눈물자국 같은 느낌이랄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1018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바다엔 양식장의 하얀 스티로폼 부표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반쯤 열린 차창으로는 따뜻한 봄햇살과 함께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 동박새 노랫소리, 몽돌 구르는 소리 등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나는 문득 이 모든 것이 꿈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간암(癌) 202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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