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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외연도에서 사랑에 대해 묻다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4년 01월 05일 17:14분951 읽음
글: 김철우 (수필가)

참 이상한 일이야. 언제부터인지 마음속에서 마치 터널 속에 들어온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어. 때론 마음의 소리가 명확하게 이해되기도 하다가 또 언젠가는 소음이 심해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있어. 문제는 이 소음이 점점 심해진다는 거야. 한번은 그 소음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세상을 향해 삐딱하게 앉았던 적도 있었어. 세월은 터벅거리며 다가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스스로 마음과 소통 불능 상태를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았지. 그게 사랑이란 걸.

나는 지금 바다 위에 있어. 갈매기가 바람에게 제 한 몸을 아낌없이 던지는 것처럼 나도 세상을 향해 나를 던지는 중이야. 네가 언젠가 그랬었지? 사랑은 꽃잎처럼 날아 마음속에 앉는 거라고. 꽃잎처럼 날아 앉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 가슴속에 사랑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그래서 나도 이 시대의 유행가를 부르기로 했지. 오규원(吳圭原) 시인이었나? 젓가락은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라고 한 사람 말이야. 그래 너를 향한 내 사랑은 엉망이었어. 그래서 사랑에도 기교가 필요한가 봐. 하나뿐인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추기 위해선 혼자 힘으론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이젠 지겨워졌어. 사는 것도 아니고 너도 아냐. 그냥 사랑이 지겨워졌어. 그뿐이야. 사람이 없이 어떻게 사랑만 지겨워질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생각해봐. 사랑이란 그냥 유행가의 후렴구이거나, 판소리에서 북재비의 추임새 같은 거야. 그 무의미한 동어반복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겠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여긴 어디지? 꿈이었나? 뭔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잠이 깬 걸 보면 배 위인 것 같은데 벌써 도착한 걸까? 그리 놀랄 꿈도 아닌데 땀에 흠뻑 젖은 손으로 가까스로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도에 도착했다가 떠나는 순간의 느낌이 지금까지의 흔들림과 달라 잠을 깬 모양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꿈이다. 처음 보는 여자이긴 한데, 분명히 내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화장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 이상하게 어딘가 낯이 익기도 하고, 아주 낯설기도 한 여자였다. 배의 난간에 기댄 채 사랑이 지겹다며,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그 여자의 오물거리는 입술이 머릿속에서 필요 이상으로 클로즈업되어 더욱 그녀의 정체를 방해하고 있었다.

꿈속의 여자와 함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깊은 잠에서 갑자기 깨어난 탓인지 대천항이 보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의 소실’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다행히 배가 녹도에 도착할 무렵부터 어렴풋하던 기억이 차차 뚜렷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대천항 여객선 터미널의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 건 비릿한 바다 냄새가 차창을 비집고 들어오던 7시 20분이었다. 바쁜 시간 속에 가까스로 하루를 비워 새벽부터 달려온 길이라서, 8시 10분에 출항하는 배를 타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되기 때문에 내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정표를 보자 배를 탈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졸음과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었다. 터미널에서 우동 한 그릇으로 간신히 허기를 달래고, 단체 관광객을 피해 배의 2층 선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까지도 기억이 명확했다. 식구들로 보이는 네 명의 남녀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정겹게 펼쳐놓았고, 낚시 가는 것이 분명한 20대 남자 둘은 낚시 장비 옆에서 졸고 있었다. 선박회사 직원인 듯한 남자는 어젯밤을 꼬박 세운 것 같은 표정으로 팔걸이 없는 의자를 찾아 누워있었고 그리고 분명히 내 앞쪽으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함께 탔던 것 같은데 그들은 보이지 않고, 기억도 거기서 멈춰져 있었다. 승객 대부분은 배의 출항과 함께 갑판으로 나가 사진을 찍거나 바람을 즐기는데 도무지 그 남녀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너 줄 앞에서 모자를 눌러 쓴 채 바른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와 그 남자의 어깨에 기댄 여자의 모습. 그것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아무리 기억의 조각들을 흩었다 모아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일 1층으로 내려가거나, 그렇다고 내가 잠든 사이에 호도에서 배를 내렸을 것 같지도 않았다. 왠지 그들은 내 일행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령에서 가장 먼 바다에 있는 외연도(外煙島)는 중청도, 흑도, 횡경도, 오도, 실마도 등 크고 작은 열다섯 개의 섬으로 이뤄진 외연열도 중심 섬이다. 바다에서 우뚝 솟아 있는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외연도는 육지에서 까마득히 멀어 연기에 가린 듯하다는 의미라니 해무(海霧)라도 끼는 날엔 여지없이 그 이름값을 할 것 같다. 더구나 바람이 잔 새벽이면 중국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할 만큼 심리적인 거리는 뭍에서 더 멀었나 보다.

외연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봉화산(279m)과 망재산(171m)의 두 봉우리가 품은 듯이 자리 잡고 있는 외연도항에 내린 시각이 오전 10시. 돌아가는 배편을 다시 확인하고, 외연도에서 가장 유명한 상록수림을 가기 위해 외연도초등학교를 찾아야 했다. 인구라고 해봐야 500명이 조금 넘는 데다가, 햇볕이 따가워지는 시간인지 항구 주변엔 주민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아, 미리 익혀둔 지도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 앞으로 눈에 익은 모자를 쓴 남녀가 손은 잡고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 멀긴 했지만 2층 선실에서 봤던 바로 그 남녀가 분명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게 이유 없이 반가워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다가가는데 관광객들 사이로 스치듯 보이는 모습이 관광객의 차림은 아니었다. 그 흔한 카메라도, 이렇다 할 짐도 보이지 않는 걸 봐서는 이곳에 연고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기 위해 갑판 위를 부산하게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도 이제 이해가 됐다. 점차 두 사람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는 순간, 갑자기 오른쪽 골목으로 돌아서는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멈춰서고 말았다. 기껏 해봐야 20대 후반쯤의 나이로 봤던 두 사람은 이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었다. 혹여 잘못 보지 않았나 다시 생각해봐도 모자와 옷차림 그리고 손을 잡은 모습들이 틀림없는 그들이었다. 내내 모자를 쓴 뒷모습만 봐서도 그렇지만 걷는 모습 또한 두 사람 모두 어찌나 정정하시던지……. 두 노인이 갔던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니 이미 골목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넘칠 만큼 풍성하게 햇살을 담은 외연도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외연도 초등학교 옆을 지나며 주민인 듯한 사람에게 다시 길을 물었다. 이제 상록수림을 찾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하늘을 덮을 만큼 빽빽이 자란 숲속에서 사랑나무를 찾는 일이 문제였다. 다행히 그는 사랑나무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숲에서 그나마 대충이라도 위치를 알았으니 헤매지는 않을 생각에 안심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하는 그의 한마디가 번쩍 귀에 들어왔다.

‘그럼 잘 보고 가세요. 손을 꼭 잡고 있을 겁니다.’
‘손이요?’
‘네. 그러니까 사랑나무죠.’
그리고는 휙 돌아서 제 갈 길을 가는 그의 뒷모습 위로 손을 꼭 잡은 두 노인의 모습이 교차되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136호인 외연도 상록수림에 들어서자 바람 대신 낯선 적막감이 몸서리를 치고 지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전에 떨어졌던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그 소리에 맞춰 새들의 소리가 온 숲속을 뒤흔들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불가시나무, 식나무, 돈나무, 팽나무, 상수리나무, 탱나무, 고로쇠나무, 찰피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뒤얽혀 있는 것이 서늘한 느낌마저 들게 하고, 몸의 여기저기에 걸리는 거미줄과 바닥을 서걱거리며 기어가는 이름 모를 곤충들이 숲 가운데 선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정성스럽게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랑나무 가는 길’이란 표시를 보고 길을 잡았다.

숲에 들어가 숨죽여본 사람이라면 숲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알 것이다. 지저귀거나 후드득 날아가는 새들의 소리, 낙엽 밟는 소리, 곤충들이 내는 소리, 작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이 바람에 나무들이 부딪는 소리들과 한데 어울리고, 빽빽한 숲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쏟아져 천연조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숲속에 홀로 서서 이 장쾌한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관객은 혼자여도 상관없다는 듯 새소리가 강해졌다가 약해지고, 곤충과 벌레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자연스럽게 조명의 빛을 조절하고 있었다. 이 호사(豪奢)를 누가 알까.

다양한 이종식생을 보며 길을 오르다가 지금까지의 표지와는 다른 표지를 달고 서 있는 동백나무가 앞을 막아섰다. 아! 사랑나무. 동백나무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연리지’가 눈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시계를 보니 10시 반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달려온 길이니, 이 나무 한 그루를 보기 위해 꼬박 여섯 시간 반을 달려왔던 셈이었다. 감격보다 먼저 소름이 끼쳐왔다. 줄기나(連理木) 뿌리가 붙는 것과는 달리, 가지가 붙어 한 몸이 되는 연리지(連理枝)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될 만큼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한 몸이 됐을까. 이런 숲에서는 햇빛도 풍성하지 않아 서로 햇빛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잎을 펼쳐야 살 수 있었을 텐데. 더구나 연리가 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한 것도 아니다. 닿은 부분이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각자의 세포가 이어져 생물학적인 결합을 완성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수령이 100~120년이나 된다는 이 동백나무 두 그루는 그렇게 한 몸이 된 것이다. 대견한 마음에 양쪽의 줄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큰 격정이었을까. 서로에게 상처를 줄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숲은 또 얼마나 숨을 죽이며 그 사랑을 지켜봤을까. 이런 것이 진정한 사랑이란 말인가.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랑. 사랑나무를 처음 봤을 때는 소름이 끼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부끄러워졌다. 이게 사랑이라면 나는 한 번도 사랑을 못 해본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영원히 사랑해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사랑이라고 포장하여 강요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숲속의 사랑나무 앞에서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가 다시 바라보니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노인처럼.

외연도항이 보이는 식당에서, 객지에서 가진 돈 다 잃고 십 년 만에 고향을 찾은 탕아처럼 허겁지겁 밥을 비웠다. 새벽부터 나섰던 길이기도 했지만, 꿈속의 알 듯 말 듯 한 여자의 얼굴과 손을 맞잡은 두 노인의 모습 그리고 사랑나무를 보고 난 후의 부끄러움까지 겹쳐져 깊이를 알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허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배가 출항하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기에 외연도의 북쪽 해변 중에 하나를 보기로 하고 외연도 초등학교 뒤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었다. 왼쪽으로 사랑나무가 있는 당산과, 오른쪽으로는 외연도에서 가장 높은 봉화산의 샛길을 넘자 명금해변이 펼쳐졌다. 커다란 몽돌이 깔린 이 해변의 산책로를 따라가면 어디가 나올까. 작은명금과 돌삭금, 누적금을 지나 고라금까지 걸을 수 있을까.

강렬한 햇살을 피해줄 작은 벤치에 앉았다가 항구로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면서 생각은 다시 꿈속의 여자와 두 노인에게로 이어졌다. 도대체 누구였을까. 사랑했으나 사랑이 지겨워 이별하자던 그녀는. 아무리 기억의 항로를 되짚어 봐도 떠오르지 않는 여자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녀에게 사랑나무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뿐.
월간암(癌)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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