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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고정희 시인 생가(生家)에서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2년 12월 16일 16:15분2,620 읽음
글: 김철우(수필가)

오롯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남도사찰기행의 하나로 해남 지역의 사찰 몇 곳을 둘러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군청에서 우편으로 받은 해남 지도를 펼쳐놓고 이리저리 가야 할 곳을 찾아 일정을 정리하다가 ‘고정희’란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생가가 남도 어디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해남의 구체적인 주소까지 눈앞에 드러나니 일정이 하나 추가된 것이다. 그렇다고 원래 일정을 단축할 수 없어 ‘고정희 생가’ 옆에 조그맣게 적어 두었다. ‘시간이 된다면.’

미황사와 대흥사를 둘러보는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이미 ‘시간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이곳을 가장 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침내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길 45, 고정희 시인 생가 앞에 설 수 있었다. 활짝 열린 대문과 대문 위쪽에 ‘고정희 시인 생가’ 표시를 크게 달아놓아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 딸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았을 아버지도 생을 마감하고, 큰오빠가 지키는 집 마당 한 편에 그녀가 생전에 기거했던 건물이 비스듬히 서 있다. 대문을 열어두었으나 인사도 없이 집을 둘러보는 것이 민망하여 기척을 했으나 활짝 핀 목련만 손님을 맞는다. 조심스럽게 남정헌(南汀軒)이란 당호가 걸린 기념관의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이 서재로 쓰이고 있음을 직감하며, 문지방을 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실례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시인이 웃으며 고개를 돌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일까.

열 평쯤 되는 기념관엔 시인이 읽던 책이 빼곡하다. 기념관이란 곳이 기념할 것과 관람객을 철저히 분리하여 오히려 서먹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남정헌은 시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대부분 액자는 바닥에서 책장을 기댄 채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고, 시인의 손때가 묻은 책뿐만 아니라 사용하던 책상, 일부 육필 원고와 다녀간 독자들이 남긴 글 그리고 선머슴아 같은 그녀의 사진이 책상 위에서 웃고 있다. 책상 앞에 앉으니 시인과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기둥에 걸린 액자 속 글씨가 눈길을 잡는다. ‘고행, 묵상, 청빈.’ 시인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세 단어 가운데 특히 ‘묵상’에서 멈춰 선다.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앉아’로 시작하는 시인의 시(詩)도 같은 제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삶 가운데 몇 해의 엄중한 겨울을 버텨냈을 때도 버팀목에는 늘 시인의 작품이 낙서처럼 쓰여 있었다. 시(詩)를 통해 그녀의 어깨를 빌린 셈이다.

1948년생인 시인이 1991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발을 헛디디며 급류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으니 당시 나이 43세였다. 아깝고 아까운 나이였다. 그날 지리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폭우가 내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아직도 뱀사골을 맴도는 방문객을 바라보는 시인은 표정 변화가 없다. 방명록에 글 몇 자를 남기려다가 그만두었다. 방문할 독자들을 위해 빈칸을 남겨 두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방문해서 마지막 방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몇 자 적어 둘 것이다.

목련 핀 마당에 내려서니 활짝 열린 대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왠지 낯익다. 내사리와 고천암호 넘어 진도 땅을 가로 막고 선 것은 증산쯤 될까? 아니면 선창산일까? 빈 들판과 산을 보자 시(詩) 「묵상」의 단어들이 기억의 창고에서 낙숫물처럼 쏟아졌다. ‘적막한 산천, 수십 개의 들길, 수만 가닥 바람, 끝 모를 쓸쓸함, 나지막한 야산들,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 같은…. 시인(詩人)이 시어(詩語)를 직조(織造)하는 곳은 대부분 고향 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보니 고정희 시인도 이곳에서 언어를 건져 올린 것이 틀림없다. 그가 서울에서 신학대학을 졸업 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여성 해방 정신을 실천하며,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일을 하면서도 고향인 이곳 해남 송정에서의 삶과 자연을 늘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떠나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시간을 뛰어넘어 같은 공간에서 그녀가 늘 바라보던 송정의 들판을 보고 있던 것이다.

생가에서 시인의 무덤까지는 15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찾아가니 저수지를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시인의 무덤이 있다. 물에서 생을 달리한 시인에게 물과 가까운 음택(陰宅)이 염려스러웠지만, 주위 산세가 보호하듯 무덤을 둘러싼 것이 평온한 느낌의 물가라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생가에서처럼 이곳에도 목련 한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무덤을 향해 꽃을 피우고 있다는 점에서 묏자리를 쓸 때 같이 심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시인이 좋아했던 나무라는 것도. 무덤 바로 뒤는 동백나무가 소나무와 함께 병풍처럼 호위하듯 둘러서 있다. 이제 시인은 가고 없지만, 그녀의 불타오르던 시혼(詩魂)과 여성 해방을 위한 삶을 기리기 위해 많은 독자가 이곳을 찾을 것이다. 뜨겁게 살다 간 삶의 흔적들은 힘이 참 세다.
월간암(癌)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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