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머리 감다가 가발 벗듯 벗겨진 머리카락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2년 03월 30일 17:36분3,525 읽음

말기 난소암 극복기 - 두번째 이야기
글: 윤은혜(62년생) | 난소암 3기 5년차


삼성병원에서 수술 후 3인실에 있을 때였다. 옆 침대의 여성 환자가 말기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수시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단말마적인 비명소리에 간호사들이 뛰어오고, 배에 가득한 복수를 빼내고, 마약성 진통제를 놓고는 했다. 극심한 통증으로 비명이 지속되었으나 달리 치료할 방법이 없는 듯 병원에서는 응급조치(복수제거, 진통제 주사)만 할 뿐이었다.

말기 암인 나도 곧 저렇게 되겠거니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그 환자에 대해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남편은 그 환자의 남편과 지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연을 들었으나 나에게 미칠 심리적 악영향 때문에 감췄던 것이었다. 그 환자 남편에 의하면 불과 1년 전 “다행히 1기입니다. 조기발견이 매우 어려운데 천운입니다.”라고 통보받았다고 했다.

병원 측 권고대로 식생활이나 생활패턴의 변화도 없이 3개월마다 정기 검진만 충실히 받아왔단다. 그런데 1년쯤 되어 말기 진단을 받았고 이제는 여명이 3개월 정도라고 ‘사망예보’를 받았던 것이다. ‘천운이다. 3개월마다 검진 받아라.’라고만 하지 말고 재발 방지를 위해 면역력 증강에 힘쓰라는 말 한마디만 해줬더라면 하며 환자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했다고 했다.

남편은 내게 미칠 심리적 두려움이 염려되어 병실을 옮겨달라고 했으나 병실 부족으로 거절되었고, 그녀의 비명소리가 커질수록 나의 두려움도 점점 커져만 갔다.

얼마 후 병원에서 퇴원명령이 떨어져 나는 춘천 인근 암스트롱 병원으로 입원하였다. 2층에서 내려다보니 병원 앞마당에서 남행열차 등 가요를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는 환자들 서너 명과 인근 벤치에서 환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남편은 저렇게 흥을 내며 지내야 치료에 좋다며 나보고도 나가서 함께 춤도 추며 어울리라고 했으나 나는 춤을 출 기분이 나지 않아 벤치에 앉아 억지 박수만 쳤다.

저들도 치유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려니 하는 생각에 흥겨워 보이기는커녕 처량하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때 옆에서 함께 박수를 치며 흥을 돋아주던 병원시설관리의 입에서 가슴 섬뜩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기 계시다가 친했던 퇴원 환자들에게 1~2년 후 안부전화를 하면 전화를 안 받아요.” 뒤늦게 귀를 막고 싶은 소리였다. 그 말은 비수같이 내 가슴에 내리꽂혀 한동안 뇌리에 맴돌았다.

항암을 마치고 요양병원에 들어온 후 제일 나를 괴롭혔던 것은 심한 변비였다. 관장도 시도했지만 항문 끝에 돌처럼 굳어진 변 덩어리는 철통 수문장이 되어 배변을 막고 있었다. 항문을 만져보면 딴딴한 돌덩어리가 만져지는 듯 했다. 병원에서 시도하는 방법들도 소용없었다.

매일 암에 대한 대체의학을 공부하던 남편은 끼니마다 효소를 먹이고, 한 시간마다 물 을 마시게 하고, 배에 온열조치를 했다. 모두 소용이 없었다. 독한 항암제가 대장 내 점막세포들을 괴롭혀 장내 연동운동이 정지된 것이었다.

급기야 변비가 7일째 이어지자 나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남편이 손가락에 들기름을 묻히더니 내게 손짓하였다. 손가락으로 항문 속에 넣어 파내준다고 화장실 변기에 앉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신 시어머님 대변도 그렇게 파냈다고 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나는 치부를 남편에게 맡기기 싫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는 내가 한다고 외치며 남편이 시키는 대로 기름을 손가락과 항문에 바르고 ‘손가락 파내기’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큰 바위의 일부를 떼어낸 듯 변 덩어리가 작게 부셔져 나올 뿐이었다. 효과가 없는 것 같아 포기하려 했으나 계속하라는 남편의 잔소리에 조금씩 파내다가 마침내 큰 덩어리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하였다. 항문 끝을 막고 있었던 주먹만한 큰 덩어리가 빠져나오자 연이어 7일간 막혔던 변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시어머니를 돌보았던 남편의 경험에서 나왔다지만 처음에는 손가락을 항문 속에 집어넣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치료법(?) 덕분에 이후부터는 변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햇볕 쬐며 만보 걷기, 한 시간 동안 식사하기, 아침 공복에 온수 2컵과 복부 마사지, 지압봉 위 걷기, 10시 취침, 매 수저마다 100번 씹기, 1시간마다 물 마시기, 효소와 유산균, 복용하기, 아랫배를 따뜻하게 벨트로 24시간 온열을 유지하기 등을 변비가 무서워서 열심히 했다. 이후 변비는 오지 않았다.

남편은 하나하나 내 식생활, 운동, 물 복용 등 지도에 더하여 일본 동경대 항암제품 등의 복용을 권했다. 무엇보다 제일 역점을 둔 것은 말기를 극복한 치료 성공 비결들에 대하여 의학적, 논리적으로 소개하여 절망했던 내 정신세계가 완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한 것이었다.

또한 꺼져버린 내 신앙의 불꽃도 다시 살려주었다. 예수님도 ‘나에게 일어나 걸으라’며 응원하고 계시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모든 폭풍의 터널 끝에 밝은 태양을 예비하신 분이라며 내게 일어나 걸어오라 손짓하고 계시다고 설득하였다. 마침내 나는 아침마다 기독교 방송을 틀어놓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상구 박사님의 강의도 여러 건 들려주었는데 참 유익했고 그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을 하나 소개한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합니다. 나는 바닷가에 와 있습니다. 갈매기가 한 마리 날아옵니다. 끼르륵 소리를 내며 갈매기는 물속으로 내리찍듯 잠수하여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갈매기는 백혈구이고 그 물고기는 내 몸속 암세포입니다. 끼르륵, 끼르륵 갈매기 두 마리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몸속의 암세포 2마리가 백혈구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갈매기 숫자도 점점 많아졌다. 미국의 병원에서 도입했던 심리치료법 중 하나의 사례였다고 하셨다.

지금도 몸서리치며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삼성에서 1차 항암을 하고 퇴원 후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다른 환자들과 산에 다녀온다며 산행을 하던 날이었다. 같이 가자던 제의에도 나는 전날 산행을 했던 환자들이 뱀을 봤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손가락 사이로 뭉텅 하는 느낌과 함께 큰 덩어리가 잡혀 나왔다. 깜짝 놀라서 손을 보니 마치 가발을 통으로 벗겨낸 듯 시커먼 머리카락 덩어리가 잡혀 있었다. 너무나도 놀랍고 무서웠다. 거울을 보니 마치 좀비처럼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있는 한 추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남편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죽어 가는데 무슨 등산이야!”

항암 후유증의 시작이었다. 탈모와 더불어 식욕은 사라지고 입안이 헐기 시작했다. 변비, 부종 등의 증세들과 함께 수술한 부위의 통증들이 따끔거리며 수개월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월간암(癌)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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