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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유월의 나무
고정혁 기자 입력 2008년 09월 29일 15:53분878,297 읽음
신 영_시인이며 수필가. 남편 백혈병 2년 투병 중. 보스턴에 살고 Boston Korea신문에 칼럼연재.
저서 시집『하늘』, 수필집『나는 ‘춤꾼’이고 싶다』등.

어제 저녁에는 모처럼 기분 좋은 자리를 저의 집에서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정이 들려는데 떠나가는 분이 못내 서운하지만 좋은 일로 떠나신다 하기에 흔쾌히 보내드리기로 했습니다.
보스턴에서 일을 하시다 시카고 한 대학의 교수님이 되어 떠나시는 분인데 친구를 하나 잃은 것 같아 못내 마음 한 구석이 섭섭합니다. 만인의 친구인 이 분은 주변의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기 짱’이랍니다.
사실, 그 비결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지만 듣지 않아도 이미 알아버렸답니다. 늘 겸손한 그 마음과 태도가 누구에게도 환영받는 이유입니다.

몇 년을 옆지기와 아들과 떨어져 사시는 ‘솔개 아빠’이기도 합니다. 기러기 아빠는 한국에 아빠가 있어야 하는데, 아빠는 미국에 있고 가족이 한국에 있으니 ‘솔개 아빠’라고 이름을 지어야겠습니다. 똑똑하고 예쁜 옆지기님이 한국의 한 대학 교수라 남편 따라 미국에 올 수가 없었던 것이 솔개 아빠가 된 이유입니다. 전문직 일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 제겐 부러움이기도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주부이기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못된 심사라니…

어제 저녁의 모임은 이렇게 기분 좋은 한 남자를 보내드리는 일과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여자 조카아이랑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여름에 헤어지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잘 부르지 못하고 산지가 거의 3여 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몸도 덜 따라주나 싶습니다. 집안 치우는 일이 제게는 늘 걱정거리이기 때문이랍니다.

몸이 여린 조카는 이모가 집안을 치우는 일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곁에서 하루 종일을 거들어 주는데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헌데, 힘겨움에 도와주는 아이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집안 구석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쓸고 닦고 치우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음을 또 느끼는 날이었습니다. 집안이 환해지니 마음의 한 구석이 시원한 바람을 만나는 듯 행복했습니다.

음식을 이것저것 장만하며 조카는 야채를 씻어주고 이모는 또닥이며 도마질을 합니다. 음식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행복한 이 마음은 여전히 ‘주부의 자리’가 바로 제 자리임을 새삼 또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어려서는 짝꿍(남편)에게 더욱 정성의 마음으로 음식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한데, 아이들이 커가고 학교 공부와 그 외의 운동을 시작하며 세 아이들을 내려주고 태워오는 일은 제 혼자 몸으로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녁 시간에는 아주 간단하게 식사를 차리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녁을 소홀히 차리는 일이 못내 마음에는 미안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당당한 아내임을 말하기 위해 ‘엄마’의 힘 있는 모습으로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미안한 마음이 울컥하고 지나기도 합니다. “조금 더 따뜻한 국이라도 마련해 주었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으른 아내’이기도 하답니다. “무엇으로 아내의 그 부족한 점수를 딸 수 있을까?” 늘 글을 쓴다는 핑계로 더욱 소홀해지는 남편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오늘 저녁은 그 마음을 살짝 전해봐야겠습니다.

기분 좋은 어제 저녁의 만남으로 오늘 아침은 상쾌한 날을 맞습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너울대고 하늘빛에 반짝이는 여름나무 일들은 한 번씩 찾아와 흔들어주는 바람에 은빛 물결처럼 반짝입니다.
아, 너무도 아름다워 혼자서 창밖을 내다보다 눈물이 고여 옵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저 자연과 함께 숨 쉬는 지금의 내가 너무도 행복해서 말입니다.
“어찌 저리도 아름다운 세상을 지어주셨는지요?”
지금도 이렇듯 누리는 것들이 많은데 또 욕심을 부리며 만족해하지 못하는 저를 보게 하시니 그 은혜가 감사한 날입니다. “당신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임을 또 고백하게 하십니다.

유월의 나무를 바라보며 기쁘고 행복한 눈물을 흘립니다. 저 나뭇잎이 흔들리기까지 바람이 곁에 있었고, 고운 햇살이 있었고, 너무나 행복한 나를 만납니다. 지금까지 호흡할 수 있게 하신 그 사랑에, 그 은혜에, 오늘도 감사한 날임을, 축복의 날임을 또 고백합니다.
땅과 하늘을 이어 숨을 통하게 하신 그 은혜가 고마운 날입니다.
‘호’하고 토해놓은 내 속의 찌든 거짓들을 맑게 씻기어 주시고,
‘흡’하고 삼키는 맑은 영혼의 기운을 제게 더욱 채워 주소서!
저 유월의 나무들과 함께 호흡하는 나의 숨을 정케 하여 주소서!
어제 만났던 기쁜 그들과 함께 나누는 우리의 숨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오늘이 기쁨(기가 뿜어지는 일)이 가득한 날이 되도록…

누군가를 만나는 일, 그리고 헤어지는 일이 끝이 아님은,
서로의 헤어짐이 이별이지 않음은 서로의 호흡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렇듯, 푸른 유월의 나무들이 반짝이며 은빛 결을 내는 것처럼 우리의 숨이 곁을 내며 서로가 서로의 마음으로 교통하도록 그 믿음가운데 함께 걷게 하소서! 언제나…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우리로 만난 일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된 일보다…
수없이 많은 모래알들의 반짝임이 어찌 제 알갱이로 될 수 있었을까. 하늘이 주신 빛으로 반짝일 밖에.

오늘도 감사한 날을 맞았습니다.
저 유월의 나무를 보면서 너무도 아름다워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흘립니다. 저 은빛물결처럼 반짝이며 춤을 추는 여름 나뭇잎에 흔들리며 저도 오늘은 춤을 추고 싶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너울 너울 너울 춤을…

월간암(癌)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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