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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날개를 달아 식도암을 넘어서다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19년 06월 19일 11:10분8,171 읽음
김성웅(57) | 식도암

나는 윙바디 화물차 운전기사다. 차체에 날개처럼 생긴 문이 달려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이제 내 차 날개에 희망이라는 날개를 더 달고 싶다. 암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작년 8월 초에 건강 검진을 통해서 나는 식도암 환자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절제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온 결과였다. 진단을 받는 순간 담담했고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적에는 무역을 하면서 술과 음식 조절을 하지 못했고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에서 일했다. 그러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조선업이 휘청거릴 때 어쩔 수 없이 조선소를 그만뒀다. 그만뒀다기보다는 조선소에 일이 들어오지 않아서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 후 백수생활을 몇 달 하다가 화물차를 할부로 구입해서 지입 운전기사로 쭉 일하고 있었다.

살면서 해온 일들이 뿌리를 내리고 안정적이지 않은 임시 직업이었기 때문에 생활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물차 기사는 집이 따로 없다. 집은 한 달에 한두 번 잠시 들러 입을 옷을 갖고 나올 때 들르고 숙식은 모두 차안에서 이루어지고 운전만 할 뿐이다. 생활은 고달프고 힘들지만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018년 8월 초 토요일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마침 차를 정비할 일이 생겼다. 화물차이기 때문에 정비소에 맡기고 나면 몇 시간 동안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가 몇 달 전부터 미뤄온 건강 검진을 받기로 했다. 찾아보니 검진하는 병원이 정비소 주변에 몇 군데 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아무 생각 없이 남는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목적으로 방문했다.

검사가 끝나고 결과를 보기 위해서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담당 의사가 방으로 잠시 들어오라고 주문했다. 별 일 아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커다란 화면에 내시경으로 촬영한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암일 확률이 높다며 식도 부분을 확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젊은 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좋아했기 때문에 폐암 아니면 간암이 걸려야 정상일 텐데 엉뚱하게도 식도암이라니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은 덤덤해졌다. 그날이 8월 7일이다.

부산에도 좋은 병원들이 많이 있다. 특히 양산에 있는 부산대 병원은 최근 지어져 쾌적하고 최신의 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부산에 있는 암환자들은 이렇게 좋은 병원 두고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진단을 내린 의사도 나에게 같은 내용을 묻는다. 서울 병원에 가실래요? 아니면 부산 병원을 선택할래요? 치료가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일인데 처음부터 서울로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주저하지 않고 부산에 있는 병원을 선택하니 담당 의사는 소견서를 써주면서 부산대 병원의 수술의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부산대학병원은 친절했고 수술 날자는 9월 10일로 잡혔다. 수술을 기다리면서 마음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초조해만 갔다. 서울에 있는 집사람에게는 아직 말도 꺼내지 못했고 부산에 계신 노모와 누님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닐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끼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경과가 좋아지면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다.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서 읽을 요량이었다. 공부를 손 놓은 지 오래지만 당면한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도움을 찾는 방법이 현명해 보였다. 여러 책을 빌려 공부하면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데 담당 의사가 8월 26일 수술하기로 했던 환자가 수술을 포기하면서 시간이 났는데 그날 수술을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어 바로 승낙하고 일정을 앞당겼다.

수술을 위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날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화물차 운전기사이기 때문에 집에 매일 가지 않아도 어떤 의심을 받지 않는 장점을 이런데서 누리는구나 싶었다. 다만 일 때문에 주문을 넣는 소속 사무실의 담당자에게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일을 못하겠다는 언질을 했을 뿐이다.

수술대에 누워 혼자서 덤덤하게 눈을 감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길었던 13시간이 걸린 대수술이었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 사지는 침대에 묶여 있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통증은 이 사람들이 왜 나를 침대에 꽁꽁 묶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턱 밑에서부터 배꼽 아래까지 수술 자국이 남았다. 식도암 수술은 암이 있는 부위를 떼어내고 위에서부터 대장까지 끌어올려 연결하기 때문에 복부 전체를 절개하여 수술이 진행되니 대수술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사지를 묶었던 구속이 풀렸지만 온몸에는 주렁주렁 연결된 호스는 그대로였다. 각종 검사를 위한 장비,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링거호스, 대소변을 배출하기 위한 호스 등 족히 십여 개는 훌쩍 넘어보였다.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상태로 일어서서 복도를 왔다 갔다 걷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나는 복도를 걸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수술 부위가 터질 것처럼 아팠는데도 기침은 쉬지도 않고 계속 나왔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걷기를 계속했다.

점차 수술 부위는 아물고 회복되었다. 성공적인 수술이라 나름대로 판단이 들어 이제는 집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집사람과 노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닦으면서도 나를 위로해준다. 식구들과 나누어야 될 고통과 슬픔은 한도 끝도 없었다. 그렇게 슬픈 마음으로 병실 생활을 25일 동안 했다. 같은 식도암으로 투병 중인 환우들을 보면서 동병상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항암치료에 대한 고민이 남았다. 담당 의사는 당연히 항암을 해야 된다고 강권했지만 나는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한참 고민을 하고 집사람과 의논을 했는데 결국 집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항암을 하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보다는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치료를 받자는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각오했던 만큼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찾아왔다. 형님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던 형님이었다. 어머님이 가끔 들러서 식사를 챙겨 주곤 했는데 사업의 실패 때문인지 형님은 마음의 상처가 무척 컸던 모양이다. 끝내 곡기를 끊고서는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연로하신 어머님이 너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슬퍼할 새도 없이 형님의 장례를 치루고 형님이 갖고 있던 금전적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일을 처리해야 했다. 형님과 금전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만나서 어떤 내용인지 알아야 법원에 들어갈 서류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도암과 형님의 갑작스러운 임종은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6개월의 1차 항암치료가 끝났다. 다행히도 결과는 좋아 눈에 보이는 암은 모두 사라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올해 4월 15일이다. 형님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 이제 다시 암에 신경이 곤두섰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하던 끝에 부산이나 경남 지역에 괜찮은 요양병원이나 암재활 전문병원이 있으면 그곳에서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소문 끝에 김진목 원장을 소개받고 파인힐병원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퇴원했지만 작년 가을부터 그곳에 머물면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을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구토, 가슴통증, 설사와 변비의 반복, 손끝 발끝 저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부작용이 찾아왔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구토 증상이었다. 무엇도 먹을 수 없게 된다. 나는 한 달에 5일 정도를 입원해서 항암을 받았다. 화요일 입원해서 토요일 퇴원하는 것을 총 6회 반복했다. 토요일 병원을 나오면 끊임없이 울렁거리고 침만 삼켜도 넘어올 것 같은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파인힐 병원에 입원한 후 여기서 주는 음식은 잘 삼킬 수 있었고 또 소화도 잘 되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기분 때문인지 아니면 음식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운이 좋아서 치료가 잘 되었고 3기 정도의 식도암이 현재로는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또 몇 달 동안 이어진 치료 기간 동안 몸이 여의치 않아서 시간이 많았음에도 좋아하는 여행을 많이는 못했지만 혼자서 배타고 대마도도 가고 순천만도 가서 바람을 쐬고 왔다.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다가 암 덕분에 오랜만에 누린 자유였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화물차 기사이니 다시 운전을 하고 싶다. 아직 할부가 끝나지 않은 윙바디 화물차를 운전하면서 희망을 느낀다. 내가 노력한다면 서서히 건강은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도 생긴다. 굴복하지 않는다면 삶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굴복하는 순간 끝나고 마는 것이 이쪽 암환자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남들이 보기에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내 삶은 다시 윙바디에 희망의 날개를 달고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월간암(癌)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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