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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새우깡 한 봉지
고정혁 기자 입력 2008년 02월 23일 15:17분878,593 읽음

글 | 하루비_대구에서 태어나 소설 <꽃잎의 유서>를 냈고 최근에는 <경상도 우리 탯말>을 공저 출판했습니다. 소설을 쓰며 소소한 삶의 이야기도 잔잔히 그려내는 소설가입니다.

 

"하루비 작가. 빨리 와 봐, 여기 포크레인 불러 놨어"
오가면서 친하게 지내는 아래 미용실에서 보내 온 문자인데, 원고 쓰기에 지쳐서 만사 제쳐놓고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가 고생이다.
포크레인이라니? 땅을 팔 일이 있나? 무슨 소리시유?
"그게 아니구, 어제 술 먹고 너 울린 인간 파묻을려고 그러지."
아하, 그 꼴은 꼭 보고 싶지만 다 귀찮으니 혼자 파묻어 주시오. 했는데
"포크레인이 안 와서, 숟가락으로 땅을 파야 하니 같이 파자. 얼른 와."
그 말에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한참 뒤에 내려갔더니,
"뭐 먹을래?"
'땅에 파묻힐 인간'으로 전락한 미용사 H가 머리 감겨주고 밥 시켜주고 살살거린다.
그러지 마라, 나보다 네가 더 불쌍하다. 어떤 것이든 받는 게 편안하지만은 않다.
무력감의 극치, 목숨을 어림없는 어딘가에 맡기고 있다는 느낌. 떨어지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편안하다. 나라는 여자의 가장 큰 맹점이다.

오래 전, 간호사로 일할 때, 천식으로 일 년에 자그마치 350일을 병원에 들락거리던 아이가 있었다.
난 그 아이가 무척 안타까워, 하루는 처방전을 내주면서 아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저기요. 병원 그만 오시구요.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깨끗하게 한번 해보세요. 침대보를 털어 내고 커튼도 떼어내서 빨고, 화초를 집밖으로 내고, 배게도 등겨가 없는 것으로 바꾸고. 천식의 요인이 되는 먼지 같은 것들을 아이 곁에서 죄다 몰아내 보세요."

그 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예방접종 할 날이 되어 다시 병원에 들린 그 아이.
글쎄, 멀쩡하게 좋아져 있더라니까. 그 부모의 얼굴에 고맙다는 표정이 역력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일처럼 기쁜 내가 감동을 먹은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이 꼬마의 손에 들려진 새우깡 한 봉지. 아이는 내게 그 선물을 선뜻 주지 못하고 부끄러워 망설이고 있었다.

"얼른 드려."
엄마가 재촉하자, 겨우 내밀던 귀여운 모습. 아, 그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하고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다.
난 전생의 죄값인지 나 혼자만을 위해 살기를 이미 포기한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프다는데 박카스 한 병도 없네.
내가 살면서 그닥 베푼 건 없지만, 혹시 받은 게 많다 싶어도, 아마 그 아이처럼 새우깡 한 봉지로 갚아버리는 방법을 모르나 봐.

월간암(癌)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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