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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람의 의무
고정혁 기자 입력 2007년 12월 27일 23:01분877,878 읽음


하루비_대구에서 태어나 소설 <꽃잎의 유서>를 냈고 최근에는 <경상도 우리 탯말>을 공저 출판했습니다. 소설을 쓰며 소소한 삶의 이야기도 잔잔히 그려내는 소설가입니다.


눈이 온다는 문자를 받고 쪼르륵 나갔다가 길이 미끄러워서 돌아오는데 애를 먹었어요.
우리 집은 언덕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눈이 내리면 언덕을 내려간다는 게 거의 공포 수준이랍니다.

"내일이면 걸어다니기 힘들겠구나,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과 계단을 쓸어야겠다."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렸네요.
“아, 참 눈이 왔지?” 하고 나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있었어요.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어 자동차도, 사람도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해 절절 매고 있더군요.

우리 집은 여러 가구가 사는데 누구 하나 빗자루를 댄 흔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이야, 더군다나 어제는 일요일인데 싶더군요.
다들 “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쓸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도 이 건물에서 계단이나 마당을 쓰는 사람은 오직 저 하나뿐이에요.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고 낙엽을 쓸었지요. 그래서인지 이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나, 싶더군요.)

먹을 게 없어 하는 수 없이 마트에 다녀오는데 등산화를 챙겨 신고 엉금엉금, 거의 기다시피해서 내려갔어요.
왜 이렇게 치우는 사람이 없냐고 투덜거리면서….
우리 집 계단은 너무 미끄러워 누구든 넘어졌다 하면 꼼짝없이 아주 크게 다칠 듯해서 우선 굵은 소금이라도 뿌려뒀답니다.

최근 들어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나더니, 이렇게 쓸쓸하고 눈까지 내리니 더욱 애틋합니다. 그 분은 눈이 내리면 새벽같이 일어나 눈을 치우셨죠. 마당은 물론 집 앞과 동네 골목을 부지런히 쓸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행여나 제가 다칠세라 학교 가는 길목마다 연탄재를 뿌려주셨던 분이시죠.
그뿐이겠어요? 행여 제가 데일세라 뜨거운 물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하셨고, 또 욕탕에서 비눗물에 미끄러지기라도 할세라, 이틀이 멀다하고 목욕탕 바닥을 닦으시던 분이세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의무가 그렇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내 아버진 가장 소중한 하나의 의무를 져버리고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단 한 번도 병상에 누워 지낸 적이 없으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와 말 한마디 못하시고 그만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눈에 대한 이야길 먼저 꺼냈지만, 전 최근 ‘사람의 의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프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의무에요.
곁에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가장 큰 의무입니다.
‘자기 건강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니라 의무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기 집 앞의 눈을 쓸 듯이….
건강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육은 스스로 돌봐야 합니다.

눈이야 안 치우면 그러다 녹아버리겠지요. 그러나 내 몸은 하나뿐이고, 오직 나로 인해 우주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죽어서도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히 산다는 희망이 찾아들 때까지, 우리 모두 죽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리석은 제가 헤어지는 공포에서 벗어날 때까지 누구도 저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은 이제 의무라는 사실을 알려 드리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강할 의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모두 건강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끄러운 길에 연탄재를 뿌리고 넘어지려는 사람을 잡아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제게는 행복해야 할 자유를 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월간암(癌) 200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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