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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시작은 집에서부터
고정혁 기자 입력 2012년 09월 28일 13:56분734,760 읽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한자성어는 가정의 화목이 모든 일의 시작이며, 행복한 가정은 그 구성원들의 일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배웠던 한자성어인데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그 뜻을 되새깁니다.

주변 암환자들 중에서 편한 모습으로 잘 지내고, 암의 병증이 많이 호전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 대부분은 화목한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암이라는 병이 환자에게나, 또 그 환자가 속해 있는 가정에 커다란 불행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서서히 일상을 되찾아갑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은 평범하고 행복한 모습입니다. 처음 병을 진단 받았을 때 충격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투병이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가족들은 서로의 소중함에 새삼 감사해합니다. 환자의 배우자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환자 곁을 지켜주면서 함께 누리고 나눌 수 있는 일들을 찾아냅니다. 텃밭을 가꾸거나 함께 운동을 하거나 산을 오르는 등 취미를 붙여 꾸민다던지 여행을 간다던지 하는 소소한 일들을 찾아서 매일을 함께 보냅니다.

자녀들은 환자 앞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거창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드라마나 이웃에서 일어난 일들, 직장, 아이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입니다. 매일 되풀이되어 무덤덤했던 일들이 암환자에게는 커다란 치유가 됩니다.

우리가 행복을 제일 많이 느끼게 되는 장소는 집이 아닐까요. 그래서 여름철 휴가나 해외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집이 최고다" 입니다. 마음만 먹으로 맛있는 것을 요리해서 먹을 수 있고 세상에서 제일로 편안한 자세로 쉴 수 있습니다. 가끔 아이들이나 배우자가 화를 돋우지만 조금의 인내심만 갖는다면 모두 넘길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플 때는 누워 끙끙 앓을 수도 있고 화창한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면서 개운하게 깨어날 수 있습니다. 집은 하루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이고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가졌다면 암에 걸렸다 할지라도 극복할 수 있는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암 진단은 그저 넘어야할 높은 산일뿐입니다.

암이 유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암연구소와 미국 국립암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암의 유전 확률은 5퍼센트가 안 된다고 합니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큰 수치가 아닙니다. 암 발병에 있어서 유전적인 요인이라면 생활 패턴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우기 때문에 먹는 것, 입는 것, 말투, 잠자리, 흡연, 음주 등의 습관까지 부모의 모든 것을 흡수해서 성장합니다. 몸에 베인 잘못된 생활 패턴이 암을 발생시킬 확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암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패턴이 유전되어 암 발병의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암이라는 병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역할이 많습니다. 암을 진단받는 것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사십을 바라보는 사람이 췌장암을 진단 받았습니다. 수술을 하여 어느 정도 호전되는 듯했지만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재발을 하였습니다. 집에는 알츠하이머병(치매)을 앓고 있는 부모님이 계신데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 진단 받을 때는 희망을 갖고 치료에 임하였지만 재발을 하면서 마음에 커다란 절망이 생겼습니다.

그 환자는 부모님을 요양원에 맡기고 집을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지만 집을 나와서 여관에서 생활을 합니다. 마음에 절망이 너무 커서 주변의 지인들조차 만나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홀로 외롭게 여관을 전전하는 그의 처지가 딱하여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막상 환자는 그런 도움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환자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이야기만 들어도 답답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암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불행은 그 혼자만의 불행이 아니며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불행을 도외시하며, 온전히 개인이 책임지고 감당해야 될 몫으로 떠넘깁니다.

행복과 불행은 서로 전이된다고 합니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으면 나 또한 행복해지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면 나도 불행에 물들어갑니다. 우리 사회가 암 때문에 불행해지는 단 한사람이라도 보듬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기대합니다.

"월간암"의 편집국은 고양시 일산에 있습니다. 자유로를 지나 장항IC를 통해서 일산신도시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공교롭게도 국립암센터 또한 일산에 있습니다. 정발산 자락에 거대한 성처럼 서 있는 국립암센터를 지날 때마다 그 속에서 암과 시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병원이 저렇게 크지만 병상이 모자라는지 국립암센터 앞에는 "환자방"이라는 간판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입니다. 지방에서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서 쪽방과 같은 환자방에 기거하면서 국립암센터를 다니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렇게 암을 치료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암을 대하는 암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암을 이겨낸 많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건강과 웃음을 가정에서 다시 되찾았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단 30분이라도 가족과 마주보고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것은 암환자에게 아주 특별한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진정으로 가족의 소중함과 애틋함을 되찾는 시간이니까요. 가족이 없다면 우리 사회가 홀로 투병하는 암환자의 가족이 되어주면 됩니다. 고양시의 홍보문구처럼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공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로이 암과의 사투를 벌이는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고 웃음을 되찾아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모두들 행복한 가을을 한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월간암(癌) 201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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