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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치유력의 정체, 피톤치드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11월 23일 12:18분861,527 읽음

평화롭게만 보이는 나무들도 항상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나무는 잎, 줄기, 뿌리 할 것 없이 모든 장소에 화학무기 공장을 차려놓고, 이라크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대량 살상무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 무기는 전방위로 여러 적을 사냥한다.

우선 식물은 그들의 생존에 가장 절실한 태양에 대해서도 방어막을 친다. 엽록소가 햇빛을 받아서 광합성을 해야 나무나 풀이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태양도 너무 많이 쬐게 되면, 인간이 자외선 때문에 피부암을 얻는 것처럼 식물도 망가지게 된다. 태양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을 때, 사람이나 강아지는 그늘로 피하면 되지만 식물은 그럴 수 없으므로 자체 방위수단을 마련한다. 스스로 양산을 만들어서 자외선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 양산이 바로 '색깔'이다. 사과는 빨간 양산을 쓰고, 가지는 보랏빛 양산을 걸친다. 귤은 짙은 노란색으로 무장한다. 잎들은 대개 푸른빛이다.

이런 색깔은 식물의 세포가 살아남으려고 만들어낸 화학물질의 작용인데, 사람들은 그런 색깔 현상을 베타카로틴이니 안토시아닌이니 하는 어려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고추와 토마토의 붉은 색소는 태양에 쪼인 일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붉게 되며 일교차가 클수록 더 선명해진다. 주변의 자연조건이 가혹한 만큼 더 많은 화학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색깔은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뿐 아니라 맛과 향을 만들고,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등과 싸우는 무기이기도 하다. 이런 무기를 사람이 섭취하면(채소나 과일, 나무 등을 먹으면), 식물의 그러한 화학 무기가 인간 세포의 산화를 막아주기도 하고, 사람이 스스로 키워 놓은 암세포들에게 돌진해서 용감히 싸워주는 것이다.

이렇듯 햇볕(자외선)과 싸우고 곰팡이와 싸우느라 만들어내는 무기, 즉 베타카로틴이나 폴리페놀, 테르페노이드 같은 화학물질을 통틀어서 '파이토케미컬'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색깔의 유익함에 관한 모든 주장과 설명은 결국 파이토케미컬을 예찬하는 일이 된다.

이 파이토케미컬의 세계는 아직 그 일부만 조금 밝혀진 우주와 같다. 토마토의 항암물질 리코펜이 밝혀진 것도 불과 수년 전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이 파이토케미컬의 효능을 '피톤치드가 그렇게 한다'라고 이야기해도 별반 틀릴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식물의 자연치유력을 색깔 쪽에서 바라보면 파이토케미컬이 되고, 냄새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피톤치드가 되기 때문이다.

피톤치드는 고등식물의 잎이나 꽃, 줄기, 뿌리에서 방출되는 휘발성 방향물질이다. 식물(숲)이 갖고 있는 총체적 항균능력을 '피톤치드'라고 한다면, 식물성 정유(에센셜오일)는 '테르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이 세 가지 단어가 동일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된다.

피톤치드의 대표물질이 테르펜이며, 이미 밝혀진 것만 해도 수천 종류가 있고, 이들이 서로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얽혀서 빛을 감지하거나 자외선을 막고, 곤충과 박테리아를 물리치고,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한다.
와, 식물이 그런 복잡한 기능을 다 갖추고 있단 말인가!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테르펜은 열심히 살균이나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어떤 세균 또는 곤충의 활동을 장려하고 유혹함으로써 종의 번식을 촉진하기도 한다. 수정을 위해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는 것도 그 예다.

그런데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식물은 첨단 전투기의 내부 구조보다 더 섬세하고 복잡한 테르펜을 적절히 활용해서 '근친교배'를 피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논문지 <네이처>가 2006년 2월 16일자에 실은 내용에 따르면, 식물이 근친 관계에 있는 꽃가루가 암술에서 자라지 못하도록 독소를 방출해서 성장을 억제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의 미주리 대학교 브루스 매클루어 교수 연구팀이 이 놀라운 근친교배 방지 메커니즘을 밝혀냈다고 한다. 꽃가루의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려면 터널 같은 관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관에는 마치 지뢰처럼 독소가 일종의 주머니에 담겨 존재한다. 그러다가 근친관계의 꽃가루가 이 관을 통과하게 되면 특정 단백질이 분비돼 독소를 담고 있는 주머니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지뢰가 터졌으니 죽거나 상처 입은 꽃가루들은 수정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풀과 나무, 식물은 자신과 종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장을 해야 하며, 경보음이 울리면 언제라도 화학무기를 발사하고 지뢰를 터뜨린다. 꽃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나무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식물의 일상은 결코 포성이 멈추지 않는 잔혹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 싸움터의 붉은 피는 꽃이나 열매의 색깔이 되고, 매캐한 화약 냄새는 삼림욕의 상쾌한 방향물질, 즉 테르펜이 되는 것이니, 이 엄청난 자연의 섭리와 조화를 우리는 단 2%라도 깨우치고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겠는가.

쨍그랑……. 풍경 소리가 울리자 무성한 뽕나무 잎사귀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면서 차르르르 하고 웃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음이온이 휘날리고 피톤치드가 주위를 상큼하게 감싼다.
"제 잔이 넘치나이다."

<나를 살리는 숲, 숲으로 가자>, 윤동혁, 거름

월간암(癌)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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