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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 넘치는 치료와 투병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19년 08월 01일 18:02분5,419 읽음

미국 컬럼비아대학 의대는 내러티브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내러티브(Narrative)는 서사적인 이야기를 뜻하는데 이 대학 의과생들이 필수 강좌입니다. 그 대학에서는 의학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문학을 필수적으로 마쳐야 졸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학과 문학은 전혀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조금 엉뚱해 보이기도 합니다. 공부할 과목도 많은 의대생이 문학까지 공부해야 하다니, 무슨 의도로 그런 과목을 개설해서 학생들을 괴롭히나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그룹이라고 알려진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인데 의대생에게 문학을 배우게 하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른 대학의 의대생들은 문학을 배우면서 의학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아주 잘해야 하고 부모의 능력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되기까지 긴 시간동안 고군분투해야 전문의가 될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전문의 과정에 있는 수련의들의 힘든 생활이 보도되기도 합니다.

의학 교육을 모두 마치고 의사가 되면 밀려드는 환자를 보느라 바쁘게 일상이 지나갑니다. 최근 의학 세미나에서 모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교수와 대화중에 하루에 몇 명의 환자를 보는지 궁금해 하니 많으면 100여명 적을 때는 80여명의 환자를 만난다고 합니다. 대략 계산해도 하루 8시간 근무한다고 했을 때 시간당 10명이 넘는 환자를 만나서 진료를 하고 처방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또 환자의 입장에서는 진료를 위해서 기다린 시간은 1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정작 의사와 만나서 이야기하는 시간은 대략 5분 이내가 됩니다. 그것도 아주 길게 잡았을 때의 계산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짧을 것입니다. 이런 의료적 현실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답답할 뿐입니다.

내러티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만들어진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입니다. 영어 단어이므로 뜻이 애매할 수 있는데 비교할 수 있는 단어는 스토리텔링입니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엮어서 재미있게 하는 창작이며 그 내용에서 허구가 있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그러나 내러티브는 서사입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여 글이나 이야기로 엮습니다. 즉 내러티브는 진실을 모티브로 만들고 스토리텔링은 재미와 즐거움 위주의 결과물입니다. 글이나 이야기를 다루지만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러티브 의학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진실에 기반을 둔 환자와 의사의 공감과 소통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앞에 두고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차트만 보면서 병증만 파악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러티브 의학은 사람 자체를 보면서 병의 원인과 진행 상황, 경과 등을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진실을 기반으로 대화를 하면서 환자의 삶 속에서 병을 찾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합니다. 국내 의료진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노고를 생각한다면 상상 속의 풍경이지만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내러티브 과목을 의과 대학에 설치해서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눈도 마주치지 않던 의사 선생님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를 물어보고 대답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어느 약보다 큰 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의료진에 대한 신뢰만큼 환자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약은 없습니다. 아픔을 공감해 주는 누군가가 바로 치료해주는 의사라면 환자는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발전하는 의학의 미래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에 의과대학의 학생들에게 내러티브 문학을 필수 과목으로 넣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료실 안에서 강자와 약자를 따지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 있지만 환자는 언제나 약자입니다. 특히 암환자는 검사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암의 크기가 더 커진 것은 아닌지 등을 상상하며 고통스럽게 진료실 문 앞에 섭니다. 차트에 나온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겠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는 온전히 의료진의 몫입니다. 이 전달과정에서 내러티브 의학은 의료진의 공감과 소통 능력을 발전시켜 환자의 만족도를 높이고 적극적인 치료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인간미를 기반에 두고 발전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의료 체계가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내러티브 의학이 국내에서는 큰 소용이 없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의료진들이 반드시 갖고 있어야 될 소양입니다.

또 암과 같은 병은 치료과정에서도 심리치료와 같이 진행되었을 때 더 큰 효과를 보입니다. 암을 치료하는 것도 사람이고 투병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 속에 따뜻한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다면 투병 과정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문학적 소양은 우리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미를 일깨워 줍니다. 내러티브 의학은 냉정해지고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의료 체계에 인간미를 더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의료의 많은 부분에서 사람의 역할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실히 요구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환자와 공감할 수 있는 인간미 넘치는 의사일 것입니다.
월간암(癌) 201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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