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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내인생의 신호등 - 나는 왜 암에 걸렸는가
임정예 기자 입력 2016년 08월 16일 17:50분20,265 읽음

김재준 | 대장암 말기. 안산대 교수

나는 대학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으며, 사회봉사에도 시간을 내어 헌신하여 왔다. 2014년 4월은 국가적으로 큰 재앙이 있었던 해였는데 바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그때 나는 여느 봉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안산에서 세월호사건 유가족을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수업과 봉사활동을 겸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지만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 이상 신호가 왔는데 갑자기 혈변을 보게 된 것이다.

이때만 해도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가벼운 치질 정도로 생각하고 병원을 찾았다. 2014년 6월 중순 집 근처에 있는 대항병원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신청하고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간것과는 달리 내시경 검사로는 부족하여 CT 검사를 다시 받았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의사 선생님을 만나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소견은 대장암 말기라는 것이다. 이미 복막전이에 복수가 차 있어 수술도 불가하고 수술해도 예후가 너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 드시고 여행이나 다니라는 것이다. 과연 2014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싶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 심정이었다.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말기암 진단을 듣는데 그 상황에서 모든 암 환자들이 겪는다는 슬픔과 부정, 울화와 분노, 원망과 미움이 나에게는 없었다. 다만 가족을 남겨두고 먼저 가야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할 뿐이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4년 6월 병원에 검진받기로 한 전날, 어김없이 강의를 끝내고 퇴근을 하는 길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고 기도하고 막 출발하려는 순간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평생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멘”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 가서 날벼락과 같은 검진 결과를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암 환자들이 겪는 심리상태 변화를 겪지 않고 지내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술과 하이펙(HIPEC) 시술을 받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한참을 울었다. 물론 그 울음은 치병 내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인 눈물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섬기고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 연락을 하고 면담을 하게 되었다. 목사님도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재진을 위해 아시는 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소개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가 다시 검진을 받게 되었지만 결과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수술을 해 보자는 이야기를 들었고, 2014년 7월 3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내가 받은 수술은 상행결장과 횡행결장을 절제하였고, 맹장과 담낭도 절제하였으며, 보이지 않는 암세포를 사멸하기 위해 온열복강내 항암치료(HIPEC; Hyperthermic Intra-Peritoneal Chemotherapy) 일명 하이펙 시술도 받았다. 하이펙 시술은 복강 내 퍼진 암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반면 합병증은 여느 치료보다 높다는 것이 큰 문제였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대장암 수술로는 거의 최초로 시술을 받게 되었다.

중환자실에서의 체험
8시간여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처음 깨어났을 때 수술 부위의 통증이 밀려와 모르핀을 계속 자가 투여했다. 그러나 수술 후 하루 만에 통증이 사라졌다. 간호사는 계속 모르핀을 추가적으로 넣어 드릴까요? 라고 물어보는데 처음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모르핀을 주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주사하고 있는 모르핀은 바닥난 상태였다. 그러니 간호사는 나에게 계속 물어본 것이었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수술 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술 통증이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중환자실에서 또 한 번의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어디에선가 중후한 음성이 들렸는데 무서운 음성이 아닌 포근한 음성이었고, 음성의 뜻은 알 수 없었으나 나를 바라보고 지켜주시는 듯한 안심의 음성이었다. 물론 나는 이 음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에 틀림이 없었다. 어쨌든 수술 후 이튿날부터 모르핀주사는 맞지 않게 되었고 4일 후에 일반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일반병동으로 자리를 옮기다
일반병동에서도 대장암 분야에서는 거의 최초로 하이펙이라는 시술을 받았기 때문에 주치의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하이펙이란 시술이 개복한 상태에서 항암제를 42도로 가열하여 복강 내에 90분간 부어놓는 것이기에 합병증이 일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어서 나 또한 매우 신경이 쓰였다. 생각해보라, 38도 욕탕에만 들어가도 겉피부가 벌겋게 익는다고 표현하는데 뱃속 맨살에 그 뜨거운 항암제를 부었으니 모세혈관인들 멀쩡할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뱃속이 데쳐진 것이다.

병실에는 나보다 병기가 낮은 환자들도 재수술을 하거나 예후가 좋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럴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많다던 합병증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기적을 체험한 것은 나를 위해 수많은 시간을 중보기도를 해준 교회 성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로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이 암 극복의 원천이었다.

항암 치료를 시작하다
나는 합병증 위험성 때문에 23일이나 긴 기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금식을 했다. 수술과 금식으로 몸무게가 무려 14㎏이나 빠졌지만, 체력이 회복될 새도 없이 3일 후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종양내과 주치의 선생님 말에 의하면 지금이 가장 건강할 때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항암을 시작하게 되면 면역력과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로 이해된다. 처음 항암을 시작하고 고열로 참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후로는 고열이 자주나 아예 응급실로 가는 가방을 미리 챙겨놓기도 하였다.

1차 항암을 시작하였을 때 고열에 시달려 응급실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백혈구 수치가 500이하로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항암제 용량을 줄이자 금세 백혈구 수치가 안정을 찾기도 하였다. 항암 치료 중에는 고열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그랬듯이 열이 39도 이상 나면 병원에서는 지체 말고 응급실로 올 것을 미리 이야기해준다. 그만큼 열이 빈번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이 수반되는 것은 치유반응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모든 열이 다 치유반응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열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서는 여러 검사들을 실시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열의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이것이 염증과 싸우는 치유반응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항암 중에 열이 수반되는 경우에는 폐렴이나 패혈증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내 몸의 치유반응으로 판단하고 즐거운 상상으로 즐기면 된다.

나는 항암치료를 13차를 받았다. 정확히는 일반항암 13차, 표적치료 24차를 받았다. 12차가 한 세트인데 종양내과 주치의 선생님은 한 세트가 끝난 후 나에게 항암치료를 더 할 것인지 아니면 중단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때 나는 항암치료가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하자고 말씀을 드렸고, 주치의 선생님도 건강할 때 더 맞자고 하셔서 새롭게 시작해서 13차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의 본을 보지 못하고 약에 너무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항암치료를 중단하게 되었다.

수술부터 항암까지 숨 쉴 틈 없이, 그리고 좌우 옆도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수술을 하면서도 어느 병원을 가야할지 어떤 의사를 만나야 할지 고민이고,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항암제에 대한 독성을 걱정하고 부작용에 마음 조아리는 등의 부담을 갖고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수술하면서도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고 최선의 선택으로 알고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자연치유를 시작하다
항암치료를 중단했을 당시에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 놓고 항암치료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병원에서는 나의 의사를 존중하고 항암 치료 중단에 동의해 주었으며, 주치의 선생님은 운동과 식이를 통해 관리를 잘해줄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우연히 아내의 옛 직장 동료로부터 주마니아님을 소개받고 주마니아식 자연치유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점이 내 암치병기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생하는 아내의 뜻에 따라 시키는 대로 채식과 현미를 좀 먹는 수준이었지만 주마니아님의 치병기를 글로만 접한 내용이라 많이 부족하게 느꼈는지 아내는 직접 강의를 들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시간낭비라 생각하고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완강한 아내의 의견을 거절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두어 시간만 자리를 지키다 오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8시간 강의 내내 나는 점점 수긍하게 되었다. 주마니아 본인의 체험과 해박한 지식을 통해 왜 자연치유를 해야 되는지 확실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강의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도 암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좋다더라 하는 것을 막연히 따라하는 것과 스스로의 치유체계를 확립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의 듣기 이전엔 자연치유의 주체가 아내였다면 강의를 들은 후는 나 스스로가 치유의 주체가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이다.
월간암(癌)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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